정우열의 노자이야기

다언삭궁(多言數窮)이니 불여수중(不如守中)이라

그대로 그렇게 2008. 9. 25. 11:31

정우열의 노자이야기 13

“너무 말이 많아서 걱정이다”
다언삭궁(多言數窮)이니 불여수중(不如守中)이라

‘다언(多言)’은 말이 많다는 뜻이고, ‘삭궁(數窮)’은 자주[數] 막힌다[窮]는 뜻이다. 대개 말이 많을 때는 뭔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자연스럽지 못하면 못할수록 말이 많게 된다. 말이 말을 낳고 새끼치고 덧붙이고, 그래서 말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주 막히니, 그게 바로 여기서 말하는 다언삭궁(多言數窮)이다. 

그러니 차라리 가운데[中]를 지키는 것만 못하다는 얘기다. 여기서 말하는 중(中)은 자사(子思)가 『중용(中庸)』에서 말한 바로 그 중(中)이다.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이 아직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적에는 그것을 중(中)이라 하고, 드러나되 모자라거나 넘치거나 하지 않고 그 절도[節]에 맞으면 이를 화(和)라고 한다. 중(中)이란 천하의 큰 뿌리요 화(和)란 천하에 통달하는 길이다. 마침내 중화(中和)에 이르면 천지가 제자리를 차지하고 만물은 무럭무럭 자란다(喜怒哀樂, 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바로 이 ‘중(中)’이 ‘수중(守中)’의 중(中)과 같은 것이다. 『도덕경(道德經)』의 말로 바꾸면, 중(中)은 ‘도(道)’가 되고 화(和)는 덕(德)이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을 지킨다[守中]’는 말은 천하의 큰 뿌리를 지킨다는 말이 되고, 그게 달리말해 하느님을 모신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강의 초청을 받고 어디 가서 강의할 때 내 딴에는 아주 잘 해야겠다고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고 사람 앞에 서면 오히려 생각처럼 강의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꾸밈없이 솔직한 강의를 하면 오히려 잘 되는 경우가 있다. 작위(作爲)가 바탕에 깔린 말은 하면 할수록 막히게 된다. 그러니 여기서 중(中)을 지키란 말은 차라리 언표(言表)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참으로 수중(守中)을 하면 따로 언표가 필요 없다. 중(中)을 지킨다는 말은 하느님을, 부처님을 모신다는 말인데, 이런 사람이 볼 것 같으면 중(中)을 모신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그분을 모신거로 보인다. 부처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게 다 부처고 돼지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게 다 돼지다. 

다만 사람들 가운데 자기가 하느님을,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과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걸 몸으로 안다고 했을 때, 불가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이면 무슨 말이고 편벽된 마음으로 할리 없고, 자연 말이 많이 필요도 없다. 그래서 이른바 불언지교(不言之敎)를 행할 수 있다. ‘말없는 가르침’. 이것이야 말로 진짜 가르침이다. 요즘 우리나라 지도자들은 너무 말이 많아서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