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열의 노자이야기

湛兮, 似或存.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

그대로 그렇게 2008. 9. 22. 10:12

정우열의 노자이야기 10

“세속 거기가 바로 천당이다”
湛兮, 似或存.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

도는 깊고, 깊어서 언제나 있는 것 같다. ‘湛’은 원래 음이 ‘담’이나  ‘괼 잠’, ‘맑을 잠’, ‘깊을 잠’, ‘담글 침’, ‘즐길 탐’ 등으로도 읽는다. 여기서는 ‘깊을 잠’으로 읽는 것이 좋겠다. 

‘或’에는 ‘언제나’, ‘늘’, ‘항상’의 뜻이 있고, ‘存’에는 존재한다는 뜻이 있는데 그 존재는 있다, 없다, 산다, 죽는다 하는 차원을 벗어난 존재다. 그러니 도는 영원히 존재한다는 의미다. 도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벗어나 언제 어디서나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바로 상존(常存)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토마스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나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이는 행복하다”라고 하신 말씀도 바로 ‘상존(常存)’을 깨우치게 하시기 위해 하신 말씀이시다. 그런데 영원히 상존(常存)하는 이 도(道)가 언제 어디로부터 나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은 아마 하느님[天帝]보다 먼저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상(象)’은 ‘무엇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분명하게 잘라 말한 것이 아니라 두루뭉술한 모호한 표현이다. 이러한 모호한 표현이 동양철학의 정신이요 나아가 장점이기도 하다. 

폴틸리히(Paul Tillich)라는 신학자도 하느님을 ‘하느님 위의 하느님(God obove God)’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우리가 부르는 ‘하느님’이란, 그것을 있게 한 그 뒤의 ‘알 수 없는 하느님’을 가리키는 이름일 뿐이라는 것이다. 

자사(子思)가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요,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라 하여 하늘의 명령[天命]인 성(性)은 그대로 쫓아서 살아가는 것이 곧 도(道)라고 말씀하신 것도 언어는 좀 다르지만 결국 ‘만물지종(萬物之宗)’인 근원에 몸을 두고 근원을 쫓아서 살아가라는 말씀과 다를 바가 없다. 

불가에서는 “일미진중(一微塵中 )에 함십방(含十方)”이라 하여 티끌하나에 시방세계가 다 들어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세속이라고 말하는 바로 거기에 도(道)가 들어있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세속 죄인과 함께 하시지 않았는가? 세속 거기가 바로 천당이다. 천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티끌 속인 세속에 있다는 말이다. 그걸 예수님이 공생애(共生涯)를 사시는 동안 보여주고 가신 것이다. 

해월(海月) 선생님께서 “천지부모(天地父母)는 일체야(一體也)니라”하셨는데 이것 역시 ‘동기진(同其塵)’의 경지를 말씀하신 것이다. 우주와 하나가 되는 것, 천지 만물과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동기진(同其塵)’이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도는 우주의 ‘궁극적 근거(Ungrund)’로서 무시적(無始的)이고, 무시간적(無時間的)이고, 초시간적(超時間的)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