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열의 노자이야기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그대로 그렇게 2008. 9. 20. 09:09

정우열의 노자이야기 9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라”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좌기예(挫其銳)’라고 하면 ‘그 날카로움을 무디게 한다’는 말이다. ‘날카로움’이란 행위의 의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어떤 대상을 설정해 놓고 일방적으로 자기 주관을 관철하겠다는 태도다. 그러한 태도에 대해 대처하지 말고 그걸 그냥 놔두라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그 예리한 태도를 일삼는 사람들 때문에 갈수록 엉클어지고 있다. ‘해기분(解其紛)’은 바로 그 엉클어진 것을 풀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냥 내버려두면 그 엉클어진 것이 저절로 풀어진다는 것이다. 

지금 자연을 보호한다고 저러는데, 보호한다고 손질을 하면 할수록 더 망가뜨리기만 한다. 자연은 놔두면 스스로 작용을 한다. 자연이 스스로 작용하는 것을 일컫는 것이 ‘도충이용지(道沖而用之)’이다. 그러니까 그냥 놔두라는 말은 자연으로 하여금 스스로 작용하게 하라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아버지의 뜻을 아버지가 이루시도록 모든 작위를 그만 두라는 말이다. 그게 바로 예수의 길 아닌가?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여[挫其銳] 엉클어진 것을 푼다[解其紛]”는 말이 무슨 뜬 구름 잡자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생활 속에서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만일 누구와 대화하다 오해를 받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때 그걸 해명하려고 나서서 이러쿵저러쿵 말을 가지고 따지다 보면 문제가 풀려지는 게 아니라 갈수록 더 복잡해진다. 해명을 한다고 말을 늘어놓았다가 오히려 싸움만 더 커지게 하는 수가 많다. 

예수도 빌라도 앞에서 아무 해명도 하지 않으신 것 역시 저들의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려는 하나의 방편이 아니었겠는가? 철저한 자기 부정을 통해 상대방의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는 것이다. 
저쪽에서 아무리 창으로 찌르고 칼로 베어도 이쪽에 아무것도 없으면 그 예리함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른 뺨치는 자에게 왼뺨을 내놓으라고 하신 것도, 겉옷을 달라는 자에게 속옷까지 주라고 하신 것도, 결국은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여 엉클어진 것을 풀라”고 하신 말씀이시다. 

 “화기광(和其光)하여 동기진(同其塵)하라”는 말은 보통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고 하는데, 자신의 지덕(智德)과 재기(才氣)를 감추고 세속과 어울리라는 말이다. 자기 빛을 짐짓 감추고[和其光] 먼지와 하나가 되라[同其塵]는 것. ‘광(光)’은 빛으로 자기의 지혜와 재주로 ‘나[我]’를 내세우는 것이다. 

‘화(和)’는 부드럽게 하는 것으로 내세우지 않고 ‘나[我]’를 뒤로 감추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의 지혜와 재주와 같은 것을 내세우지 않고 세속과 함께 지낸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