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열의 노자이야기

天地는 不仁하여 以萬物로 爲芻狗니라.

그대로 그렇게 2008. 9. 23. 08:06

정우열의 노자이야기 11

만물을 풀강아지처럼 天地는 不仁하여 以萬物로 爲芻狗니라.
‘인(仁)’은 사적인 감정으로 애정(愛情)을 말한다. 원래 이 ‘인(仁)’은 공자(孔子)의 주체사상으로 유가를 상징하는 개념어(槪念語)다. 그런데 ‘불인(不仁)’이라 하여 ‘인(仁)’에 대한 반어(反語)로 사용했다. 그러니까 ‘인(仁)하지 않다’는 말이다. 누가 그렇단 말인가?  천지(天地), 하늘과 땅이 그렇단다. 그렇다면 하늘과 땅은 인정(仁情)머리가 없다는 말인가?  그게 아니다. 하늘과 땅이 인정머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사랑하는데 가려서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편애라고나 할까, 마음 끄달리는 애착이라 할까 하는 그런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만물을 공평무사(公平無私)하게 대한다는 말이다. 천지는 인간이 바라는 기대나 희망이나 믿음과는 무관하게 스스로 그러한 생명체다. 사물이 온전하게 존속되지 못한다는 것은 곧 천지가 만물을 온전하게 생성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천지는 “만물로 풀 강아지를 삼는다(以萬物爲芻狗).” 여기서 ‘以A爲B’는 ‘A를 가지고 써 B를 삼는다’는 뜻인데, 이것은 “A를 B로 간주한다”는 뜻이다. 즉 영어로 말하면 “to regard A as B”가 된다. 

그럼, ‘추구(芻狗)’란 무엇인가?  ‘추(芻)’는 ‘꼴 추’, ‘짚 추’의 뜻이 있다. 꼴이란 말이나 소의 먹이로 사용하는 풀을 말하고, 짚이란 벼의 이삭을 떨어낸 줄기를 말한다. 그러니까 ‘추구(芻狗)’란 풀이나 짚 따위로 만든 개 모양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옛날에 이 추구(芻狗)를 만들어 제사를 지내고 제사가 끝난 후에는 내다 버렸다. 

우리나라에서도 내가 어렸을 때 보면 정월십사일 저녁때 짚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비단으로 옷을 입힌 후 돈을 매달아 보름날 아침 일찍 길가에 버렸던 생각이 난다. 그때 그 인형을 ‘제웅’이라고 하였다. ‘추구(芻狗)’는 소용이 있을 때는 이용하고 소용이 없을 때는 버리는 물건을 비유한 말로 쓰인다. 그러니까 천지는 만물을 마치 추구(芻狗)같이 여긴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사람들 눈에는 뭐냐 하면 무정(無情)해 보인단 말이다. 

『장자(莊子)』에 보면 “불이심손도(不以心損道)하고 불이인조천(不以人助天)하라”는 말이 있다. 인간의 마음으로 도(道)를 헐지 말고 인간의 힘으로 하늘을 돕겠다고 하지 말라는 뜻이다. 인간의 편벽된 마음이라 할까 사사로운 정 따위로 하늘의 도를 어지럽히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제 나는 곧 죽을 것이다. 사람들한테 죽임을 당할 것이다.”하고 말씀을 하셨을 때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 선생님이 사람들 손에 붙잡혀 처형을 받으시다니요?  그건 안 될 말씀입니다. 그리로는 가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있는 한 선생님을 그리로 보내드릴 수는 없습니다.”하면서 앞길을 가로막는다. 

이때 이 베드로의 지극히 ‘인간다운’ 행위가 ‘이심손도(以心損道)’요 ‘이인조천(以人助天)’이다. 그래서 이때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내 뒤로 물러서라. 네가 어째서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느냐?”하고 무서운 책망을 들었다. 베드로가 바로 ‘풀 강이지’이요, 또한 인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