かんぽう

불교의 자아와 면역학의 자기

그대로 그렇게 2009. 11. 6. 15:50

이상곤의 타임머신
불교의 자아와 면역학의 자기
뇌사는 인간의 생존이 자아를 인식하는 정신에 있음을 분명히 규정한 것이다. 근대 철학의 기수인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규정하므로써  정신과 사유가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본질임을 분명히 하였다.의학적으로 보면 달라진다. 실제 뇌사가 되어도 인간은 죽지 않는다. 

바로 면역이 활동하기 때문에 외부 바이러스나 내부 음식물의 독소를 방어하고 제거한다. 면역은 인간의 사유활동보다 더 근원적인 생명의 본질인 셈이다.
불교의 깨달음과 지혜는 자아에 대한 깊은 자각이다. 인간의 모든 고통이 자의식 때문에 생겨나면서 소유와 집착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면역학도 불교의 자아처럼 자기와 비자기라는 비과학적이면서면서 애매모호한 개념으로 전제된다. 우주론적인 거대한 세계와 반대편에 서서 가장 미세한 세계인 세포 차원에서 분자론적인 해석이 거듭될수록 불교의 자아와 면역학의 자기는 서로 맞닿아 있다.

불교의 최고경전인 반야심경은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관(觀)은 황새가 먹이를 바라보는 모습이다. 먹이를 살피듯 마음을 두고 요모조모를 따져본다는 뜻이다. 

덥석 달려들다보면 사냥에 실패하기 때문에 고요하게 평정심으로 모든 먹이를 둘러싼 환경을 입체적으로 바라본다는 뜻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보고 싶은 면만 보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쪽 면만 바라보며 거기에 모든 가치를 두고 집착한다. 

예를 들면 코막히는 사람은 코가 전부이고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눈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모든 것은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 자(自)는 자아이며 보살은 보리살타라는 말로 지혜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전체적인 의미는 자아를 요모조모 입체적으로 지켜보는 것에 지혜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면역학에서 이물질과의 전쟁도 이런 의식을 바탕으로 한다(이하 타다 토미오의 면역의 의미론). 바이러스나 이물질인 비자기가 침입하면 우리의 군인인 대식세포 마크로파지는 탐식작용으로 이물질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그리고는 그 파편을 자기의 고유 이름이자 바코드인 hla항원 위에 싣는다. 국방부에 해당하는 헬퍼 T세포는 이를 알아차리고 세포나 B세포에 지령을 내려 면역반응이 일어난다. T세포가 이물질을 인식하는 과정은 자기에 조회하는 과정이다. 이물질을 비자기로 쉽게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비자기로 변했다고 인식한다. 

만약 바코드가 홍길동이였다면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탐식하고 난 뒤에는 홍길동ㄴ 으로 바뀐다. 이 바코드는 입체적이다. 이름의 변화를 인식할 때도 한쪽면만 보면 그대로 착각할 수 있지만 요모조모 따져보는 관의 상태이기 때문에 자기의 비자기화를 인식하고 바이러스와 세균과의 전쟁을 이끈다는 것이다.

1960년대까지의 면역학은 우리 몸의 면역계가 이물질을 손쉽게 바로 인식하는 기구로 생각한 반면 지금의 면역학은 원래의 자기를 인식하는 기구가 자기의 비자기화를 인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자기는 언제나 자기라는 시각 위에서 인식된다는 점이 핵심이다. 이점은 관자재보살의 의미와 맞닿아 있다.

일련의 면역반응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먼저 조혈간세포라는 뿌리세포로부터, T세포, B세포, 마크로파지 등 다양한 세포로의 분화가 계속 일어나야 한다. 이런 분화의 비율은 쉼없이 계속되면서 변형되고 새롭게 자기 조직화 된다. 외부적 자극이 없이도 내부의 신경계와 반응하면서 파도처럼 출렁인다. 세포간의 비율은 한번도 고정되지 않는다.“자아는 시공이 각기 다름에 따라 쉴새없이 변하며 순간적으로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다”라는 제법무아(諸法無我)의 가르침과 같다.

반야(般若)를 한자로 풀이하면 배가 항구에서 떠나면 돌아오는 것이다. 면역세포들이 다양한 생산과 반응을 통해 비자기의 침입에 대해 합목적적이고 통합된 반응을 통해 전쟁을 종식시킨다. 전쟁은 일반적으로 반드시 종식되고 직전의 평형상태로 돌아간다. 바로 배가 떠나온 바로 그곳으로 돌아가는 셈이다.

면역학에서 단백질이라는 거대 정보 덩어리를 계속 분해하면 폴리펩타이드의 상태로 변한다. ‘자기’로 처리되던 단백질이 잘게 쪼개 전달되면 숨겨진 정보가 나타나면서 ‘비자기’로 인식된다. 자기와 비자기의 구별은 애매하다. 비자기 또한 자기의 연장선에 존재하며 순간순간 비자기로 인식할 뿐이다. 바로 자타불이(自他不二)의 가르침이요, 모든 우주가 자기라는 것이다. 세포 속에서도 이점은 확인할 수 있다. 우리 몸 속에는 신경전류가 흐른다. 전류를 발생하는 발전소 역할은 미토콘드리아가 한다. 미토콘드리아의 원래 모습은 박테리아다. 원시세포때 세포내로 침입하여 발전소 역할을 자임한 것이다. 바로 이물질이 자기내부로 들어와 자기화한 증거이다.

단백질이 더 잘게 부서지면 펩타이드의 상태로 바뀐다. 이렇게 되면 자기라는 인식 장치가 사라지면서 면역반응은 사라진다. 바로 자기가 사라진 상태이다. 열반(涅槃)은 뻘을 의미한다. 뻘은 모든 생명이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에 서서 조건에 의해 나타났다 조건에 의해 사라지는 상태다. 자아가 소멸되어 평온과 지혜를 얻는 해탈의 경지다. 자기를 놓는다는 것이다. 세포의 차원에서도 자아와 자기는 맞닿아 있다.
이상곤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