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성대는 과연 별을 보는 장소였을까”
천문학은 한의학의 원형이다. 경혈 이름에는 천추, 선기 등의 북두칠성의 이름이 있으며 태백, 화개 등 다른 별자리 이름도 많다. 예문지 제자략에서는 “음양가라는 유파는 천문을 맡은 희화의 관직에서 나왔다. 해와 달과 별을 관찰하여 책력을 만들고 백성에게 농사를 가르친다”로 규정하였다.
햇살이 눈부신 추석날의 오후, 드라마 ‘선덕여왕’으로 북적이는 경주를 둘러 보았다. 특히 눈길이 머무는 곳은 분황사와 첨성대. 분황사를 들렀다가 첨성대로 가는 샛길은 걸어서도 10분 내외의 아주 가까운 곳이다. 분황사는 향기나는 황제의 절이란 뜻으로 선덕여왕 자신의 절임을 분명히 한 곳이며 첨성대는 별을 관측하는 천문대로 알려진 곳이다.
이 두 곳은 선덕여왕이 건립하여 완성한 유서 깊은 곳이다. 유사점은 한 가지 더 있다. 건축 양식으로 벽돌을 쌓은 모전이나 전탑모양을 하고 있는 점이다. 인도의 탑은 석가의 진신사리를 모신 신앙의 대상이다. 모두 돔 형태의 모전 탑이나 전탑양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분황사와 첨성대는 암석을 벽돌형태로 절단하여 쌓아야 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보나 시간상으로 많은 공이 들어가는 양식인데도 원형의 인도양식을 채택한 것은 왜일까? 여기에는 선덕여왕의 병약한 몸과 관련이 깊다.
선덕여왕 질병 심하게 앓아 독경으로 병 고치려 해
선덕여왕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질병을 심하게 앓았던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선덕여왕 5년 636년에 왕의 병에 기도가 무효하므로 황룡사에 백고좌를 설치하고 승려를 모아 인왕경을 강하였다고 기록되어 독경으로 병을 고치려 하였다.
삼국유사에도 밀본법사의 글에 선덕왕의 병이 오래되어 흥륜사의 스님 법창에게 치료를 하였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다가 밀본법사의 독경에 의해 완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분황사에 모신 부처도 약사대불인 점을 보면 그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이 시기의 치료는 불교와 의약학이 겸비된 승려의약학이 전래된 것이다.
여기에서의 의약학은 종교적인 신앙이 아닌 인도의약학이 중심이다. 인도의학은 알렉산더의 동방정복 이전에 그리스 주위에 전해져서 히포크라테스 의학에 인도의 약물이 취급될 정도다. 특히 석가의 치유권을 이어받은 지바카의 이야기는 뒷날 편작신화의 모태가 될 정도로 유명하다. 984년 일본 원융왕 때 만들어진 의심방이라는 책에 기록된 신라의서의 이름은 신라법사방이며 뒤에 신라법사비밀방으로 이어지는 것을 염두에 두면 신라의 의술은 불교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중국 전래 불교에서 원형의 불교에 대한 숭배는 바로 뒷날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는다. 선덕여왕의 어머니는 마야부인, 바로 석가의 어머니를 딴 이름이고 보면 원시불교와 탑에 대한 숭배는 필연적인 것이다. 첨성대는 과연 별을 보는 장소였을까에 대한 의문은 여왕의 절대적인 관심사인 불교 나아가서는 원시 인도 불교와 인도 문화 숭배에서 벗어날 수 없다.
동양의 천문학은 농사를 짓기 위한 실용의 학문
동양의 천문은 서양의 천문학과는 전혀 다르다. 그 차이는 동양의 천문은 학문 자체가 아니라 농사를 짓기 위한 실용의 학문이기 때문이다. 어느 별이 어떻게 나타나고 사라지느냐보다는 언제 볍씨를 뿌리고 언제 물을 대주며 추수는 언제 해야 하는가를 해결하기 위한 시간의 관측자이기 때문이다.
농경은 인류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혁명이다. 절대자의 뜻에 의해 만들어진 곡물과 동물을 찾아 떠돌다가 스스로 절대자의 흉내를 내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양의 절대자인 왕에겐 시간의 지배자가 되는 것이 바로 하늘의 뜻을 아는 절대자로 변신하여 어리석은 백성을 가르치는 위대한 지배자가 된다.
특히 태양이 지구에 뿌리는 에너지 장이 낮과 밤, 봄·여름·가을·겨울의 변화를 만든다는 것을 알고 나면서 태양의 질서를 규명하는 것이 인간 삶 전반의 규범이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태양이 하늘을 달리는 일정한 길이 있음을 알고 길 주변에 서 있는 표적이 되는 별자리를 정한다.
사계절에 맞춰 각각 계절별로 7개씩 별을 정해 1년 28개의 별자리를 기준으로 만든다. 28개의 별이 떠오를 때마다 땅속의 생명이 일제히 깨어나고 열매 맺는 시기가 일정하다는 것을 알면서 농사는 더욱 정밀하게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동양의 28수 별 중의 첫 번째 별인 각수는 봄을 상징하며 춘분날 나타나 농사의 때를 알리며 추분이면 사라진다. 바로 농사의 때를 알려주는 것이다.
첨성대 내부 원통은 태양 궤도 관찰로 농사의 때 감지
옛날 천문의 보는 방식은 현재의 망원경으로 보는 것과 달리 있는 그대로의 하늘을 본다. 굳이 더 잘 보기 위해 높이 발돋움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고려시대의 천문대나 조선시대의 천문대도 낮으막 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유추하면 첨성대는 원시불교의 탑 형식, 인도의 산치 대탑의 형식을 빌려 천문학과 결합한 양식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첨성대를 쌓은 석단은 27단, 맨위의 井자 모양의 돌까지 합하면 모두 28단으로 기본 별자리 28수를 상징한다. 첨성대를 쌓은 돌의 수는 361개 반으로 음력으로 따진 1년의 일 수와 일치한다. 석단 중간의 네모난 창의 아래위 12단은 12달, 24절기를 상징한다. 첨성대 꼭대기는 신라 자오선의 표준이 되었으며 각 면이 정확히 동서남북을 가리킨다.
제일 관심은 어떻게 어디에서 별을 관찰했을 것이냐는 점이다. 영화 아폴로 13호라는 영화 속에서 톰 행크스는 지구를 찾아내어 대기권에 진입하기 위해 우주선 기내의 모든 등을 꺼버린다. 땅에서 별을 보는 방법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이 어둠에 묻혀야 한다.
첨성대 내부의 원통은 가장 원시적 어둠으로 별을 관찰할 수 있는 비밀의 열쇠다. 하늘의 모든 별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태양의 궤도를 관찰하여 농사의 때를 목표로 한 것이다. 천문의 변화는 왕에게 보고돼야 하는 중요한 사안이기에 왕궁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원칙이다.
또 하나의 가설을 이야기하자면 우리 민족 고유의 특질은 칠성신앙과 뿌리가 깊다. 전국 곳곳에 산재한 고인돌군에는 대부분 칠성이 새겨져 있다. 칠성당에 빌어서 아이를 낳고 칠성판에 누어서 저승으로 가는 것이 우리 민족 삶의 원형이다. 지금도 절에 가면 칠성당이 존재한다. 토착신앙인 칠성신앙과 불교신앙의 타협인 셈이다. 김유신 장군도 등에 칠성무늬를 타고 났다는 기록을 보면 칠성신앙은 신흥종교인 불교와 각을 이루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천문대의 위용은 선덕여왕의 불교 신앙을 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원시불교의 탑인 스투파, 돔형태의 모전탑 전탑의 양식과 칠성신앙의 타협을 통해 이데올로기의 통합을 노린 것이 바로 첨성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