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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을 잘 놓는 자는 보사의 방법에 능통하다” -- 허임의 침구경험방 관련

그대로 그렇게 2009. 10. 16. 14:47

“침을 잘 놓는 자는 보사의 방법에 능통하다”
이론은 현실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이지 거기에 얽매일 이유는 없다. 특히 음양오행은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응하기 위해 개연적 법칙을 찾아낸 것이지 절대적인 원리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서한 시대 동중서가 모든 우주의 현상을 상수로 파악할 수 있다고 했지만 참위서만 난무했지 어느 것도 제대로 설명한 것은 없었다. 특히 현실적인 의학 분야에서 음양오행의 이론보다는 체험을 통한 진지한 실천한의학이 중요한 것임은 분명하다. 

조선시대, 무소불위의 임금에게 요즘말로 개기는 의사, 그것도 천출 출신의 침의(鍼醫)가 실천한의학의 자존심 허임이다. 아버지는 악공인 허억복이고 어머니는 천출인 노비 출신의 천민이며 고향은 전라도 나주다. 하지만 그의 7대조는 세종대왕 때 명망높은 허조다. 단종복위 운동 때 집현전 부수찬으로 연루되어 천민으로 전락한다.

광해군 2년 “침의 허임이 전라도 나주에 가 있는데 위에서 전교를 내려 올라오도록 재촉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도 오만하게 집에 있으면서 명을 따를 생각이 없습니다. 군부를 무시한 죄를 징계하여야 하니 국문하도록 명하소서.” 
이뿐만 아니다. 광해군 6년에는 사간원이 아뢴다. “어제 임금께서 ‘내일 침의들은 일찍 들어오라’는 분부를 하였습니다. 허임은 마땅히 대궐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급히 들어와야 하는데도 제조들이 모두 모여 여러 번 재촉한 연후에야 느릿느릿 들어왔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경악스러워하니 그가 임금을 무시하고 태연하게 자기 편리한대로 한 죄는 엄하게 징계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잡아다 국문을 하여 그 완악함을 바로 잡으라고 명하소서.” 

허준도 칭송했던 조선시대 침술의 자존심

여러 차례 사간원의 요청이 있었지만 그의 행동은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다. 한술 더 떠 치료를 잘한 공로로 가자, 즉 포상금을 받는다. 조선시대 불세출의 명의인 허준마저도 침에 대한 허임의 의술을 칭찬한다. 선조 37년 허준이 임금의 물음에 답한다. “신은 침을 잘 모릅니다만 허임이 평소 말하기를 경맥을 이끌어 낸 다음에 아시혈에 침을 놓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라고 답한다. 허준은 동의보감의 질병마다 침구치료 혈자리를 표시했던 침구학의 대가다. 나이를 보더라도 허준의 나이 58세, 허임의 나이 34세 불과한 점에 비추어 보면 대단한 칭송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저술한 침구경험방은 국제적으로 소개된다. 젊은 시절 조선에 유학왔던 오사카 출신 의사 산센쥰안은 조선의 의사들이 침구를 중시하고 하나같이 허임의 침구방을 배워서 이용하는 것을 눈여겨 본다. “유독 조선을 침에 있어서 최고라고 부른다. 평소 중국에까지 그 명성이 자자하다는 말은 정말 꾸며낸 말이 아니다”라고 평가힌다. 

그는 일본으로 돌아갈 때 침구경험방을 가지고 가서 1725년 일본판으로 간행한다. 청나라 말기에 요윤종은 침구집성이라는 저서를 남겼는데 그 책이 침구경험방을 표절한 것으로 밝혀질 정도다. 임진왜란 초기에 궁중에 들어와 광해군까지 26년 동안이나 총애를 받은 그의 침구비법은 무엇일까. 
여러 기록에 의하면 허임은 침을 놓는 기법에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선조 37년 편두통을 앓았을 때 허준은 병을 진단하고 남영은 혈자리를 잡고 허임은 침을 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점은 그의 침기술을 반증한다. 침구학은 여러 분야로 나뉘어져 있다. 경혈을 연구 정리하는 경혈고증학파, 침을 찌르고 자락하여 피를 뽑는 자락방혈파, 침을 놓는 기법을 중시하는 수법파 등이 있는데 허임이 이 수법파에 속한다. 수법파 기술의 결정판이 보사법인데 그의 보사법은 비법으로 인정되어 허임보사법으로 따로 분류된다.

수법파 기술의 결정판인 보사법 널리 인정

그가 쓴 침구경험방의 서문에도 이점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불민한 나는 어릴 때 부모님의 병을 고치려 의학에 몸담은 뒤로…환자를 치료하는데 진료의 요점과 질병의 변화 과정, 보사법을 명확히 밝히고자 한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보사법에 대한 자긍심을 보인다.
1748년 통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간 의사 조숭수는 조선침구의 특징을 묻는 일본의원 가와무라     코에게 침구보사를 설명한다. “침을 잘 놓는 자는 보사의 방법에 능통하다. 조선에는 허임이 가장 침을 잘 놓았고 김중백이 이어받았다.”(상한의문답)

허임보사법의 수법은 어떤 것일까. 한의사면 누구나 알지만 소산화법과 투천량법의 변형이다. 이 방법이 시간이나 노력이 지나치게 많이 소모되자 간편하면서 기를 보하고 사하는 방법을 구사하였다. 최근 침구사들이 허임을 자신들의 방패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의 보사법은 단순한 침구방법이 아니라 음양허실표리에 대한 한의학 이론의 바탕 없이는 접근 불가능한 단순하면서 심오한 이론배경이 숨어져 있다. 

만약 침을 5푼 깊이로 찌른다면 2푼을 찌르고 멈추었다 2푼을 찌르고 나머지 1푼을 찌르면서 숨을 들어마시게 한다. 이 점의 의미는 풍선에 바람을 불어 넣는 것과 같이 내 몸에 기를 팽팽하게 채워 넣는 것이라 하여 보법이 된다. 사법은 이와 반대의 방법을 쓰며 풍선에 공기를 빼는 것처럼 자침한다. 특히 그가 강조한 것은 오른손으로 침을 놓는다면 왼손을 놀려서는 안된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혈(穴)이라는 특성을 이해하여야 한다. 혈은 구멍인데 피부로 덥혀져 있다. 열려진 것이 아닌 피부이므로 문질러서 내면의 기가 활동하게 하고 기가 활동하면 블랙홀처럼 구멍이 생기면서 기의 흐름이 활발할 때 자침해야 효과를 높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세 번 나눠 2푼, 2푼, 1푼 찌른 것은 천지인 의미

세 번을 나누어서 2푼, 2푼, 1푼으로 찌른 것은 상중하의 뜻으로 천지인의 의미다. 혈자리는 기를 조절하는 것이 기본 목표다. 기는 다양한 의미로 이해할 수 있지만 하늘과 땅이 마주쳐서 생기는 기후의 변화로 대표된다. 태양으로 대표되는 하늘의 변화를 시간으로 규정하고 사방팔방의 공간인 땅의 변화를 합해서 계량화 한 것이 혈자리가 된다. 바람, 더위, 추위, 습기 등 기후 변화처럼 혈자리는 하늘과 땅의 만남을 통해 몸을 데우고 식히며 팽팽하게 만들거나 수축하는 변화의 중심축이 된다. 그의 침법은 단순하지만 이처럼 본질을 읽어내고 임상이라는 실전에 적용한 비법인 셈이다.

필자도 임상에서 이 침법을 응용해 보았다. 알레르기비염은 외부물질에 대해 예민해져서 꽃가루나 온도 변화를 적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콧물로 씻어내고 재채기로 밀어내고 가려움으로 긁어내려 한다. 외부에 대해 팽팽한 긴장감이 예민함의 원인으로 지목하여 풍선에 바람빼듯 사법을 실시하여 좋은 치료효과를 보았다. 이명도 귀안의 신경세포인 유모세포의 흥분을 진정하는 치료를 통해 좋은 효과가 있음을 실증하였다.

그가 중앙에서 사라진 것은 임금의 하교한 바를 누설한 때문이다. 광해 15년 광해군은 자신의 질환이 신하들에게 누설되는 것을 알고 분노하여 허임과 안언길 등의 의관을 파직한다. 수없이 궁중에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한 그였지만 그해 바로 광해군이 쫓겨 나므로 다시는 어의로 돌아오지 못한다.

관념적인 학문보다는 실질을 중시한 그답게 그의 저서 서문은 기술의 습득을 강조한다. “침구기법을 손에 익혀라”(得之於心 應之於手)라 하였고 “비법은 주어도 교묘한 재주는 줄 수 없다”라고 강조했다. 왜 그의 침법은 사라졌을까? 의학은 사회의 한 부분이다. 유학과 오행 등 관념과 교조주의 철학에 사로잡힌 조선의 지배구조가 일세를 풍미한 그의 치료법마저 삼켜버린 셈이다. 문헌을 끌어 모으는데만 급급했던 다른 서적과 다르게 간결한 내용, 실용성이 돋보이면서 자신의 경험을 수록한 침구경험방을 저술한 그는 시대의 이단아로 눈을 감았다. 그는 일본과 중국을 울렸지만 정작 조선에서는 잊혀진 조선침구학의 자존심이었던 셈이다.
이상곤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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