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열의 노자이야기

常使民無知無欲, 使夫知者不敢爲也, 爲無爲則無不治.

그대로 그렇게 2008. 9. 19. 16:33

정우열의 노자이야기 7

“자연의 섭리에 따르라”
常使民無知無欲, 使夫知者不敢爲也, 爲無爲則無不治.

‘사민무지무욕(使民無知無欲)’은 백성으로 하여금 무지무욕(無知無欲)하게 하라는 것이다. ‘무지(無知)’는 아무것도 모르는 걸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따르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안다’는 것이 사람의 지식으로 알고 모르고 하는 그런 경지의 앎이 아니다. 

인간의 지식으로의 한계를 넘은 경지를 말한다. 학문을 한다는 것이 결국 지식을 쌓아가는 건데 그 쌓여진 앎[知]을 모두 버리지 않고서는 여기서 말하는 ‘무지’의 언덕에 닿을 수 없다. 강을 건너려면 배가 있어야 한다. ‘무지’의 언덕에 닿고자 배를 만드는 것이 곧 ‘위학일익(爲學日益)’의 차원이다. 

일단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무지’의 언덕에 닿으면 이젠 배를 버려야 한다. 그 배를 버리는 작업이 ‘위도일손(爲道日損)’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무지’는 뭘 모른다는 게 아니라 제대로 안다는 말이다. 

소크라테스가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밖에는 아는 게 없다”고 하였다. 참으로 안다는 것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고 아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꼭 말과 이론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행동으로 보여 이미 속에 있는 것을 나오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노자는 이를 불언지교(不言之敎)라 했다. 그런 경지에 이르고 보면 저절로 무욕(無欲)이 된다. 뭐 따로 바랄게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지무욕(無知無欲)’이란 말은 아는 게 없어서 욕심을 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사물의 이치를 바로 깨달아 도(道)의 경지에 이르러 저절로 욕심이 발동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부지자불감위야(使夫知者不敢爲也)’란 아는 사람[知者]으로 하여금 감히 나아가 행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이다. 즉 스스로 뭘 좀 안다고 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나서서 거들먹거리지 못하게 하라는 뜻이다. 뭘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거의가 욕심을 가지고 있다. 그 욕심이 선의적 경쟁심에서 나온 것이면 좋겠는데 이놈이 사욕으로 빠지게 되면 결국 도둑놈이 되고 만단 말이다. 

요즘 고급관리치고 도둑놈이 아닌 사람이 얼마나 되나?  그러니까 ‘아는 사람(知者)’을 떠받들게 되면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싸우게 되고 도둑질이나 하고 그렇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테크노크라츠(technocrats)가 바로 여기서 말하는 ‘부지자(夫知者)’이다. 전문가라는 게 자기 전공분야에서는 박사일지 모르지만, 다른 분야에선 거의 깡통이다. 세상일이란 모두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전문가들만 가지고 토막토막 나누어놓으면 전일성(全一性)이 없어져 버린다. 

결국 지식의 모자이크 밖에 되지 못한다. 그러니까 죽은 것을 갖다가 한데 꿰매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말하자면 생태를 죽음의 무기태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이에 대한 대답이 여기있다. 즉 “위무위즉무불치(爲無爲則無不治)라”고 해서 ‘무위(無爲)’로 하면 다스려지지 않는게 없다고 했다. 여기서 ‘무위(無爲)’란 하지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되 인위적으로 하지 말고 욕심없이 자연을 따라서 하늘이 시키는데로 아버지 말씀에 순종하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천연(天然)에, 자연의 도리에, 또 도(道)에 합당하게끔 행하는 것이다. 그렇게 행하면 모든 것이 다 다스려진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