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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창(羌)족(W 펌)

그대로 그렇게 2008. 12. 23. 15:01

 최후의 창(羌)족


 한족이 만리장성을 이내로 하여 중국대륙의 중심세력으로 자리를 굳혀갈 때 장성의 변경주변부에는 이미 선사시대부터 수렵. 채집생활을 하며 추장단위의 부족을 형성하고 있었던 유랑족속들이 무수히 흩어져 살았습니다. 그 중에서 고대 중국의 역사에서 한 때 백색도살자로 악명이 높았던 족속을 칭하여 창(羌)족이라고 하였는데 고대에는 한족의 생존마저 위협할 정도로 강성했던 그 창족이 이제 쓰촨 대지진이라는 크나큰 자연재해의 희생양이 되어 지상에서 최후의 부족이 하나가 될 지경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강족을 통해 열람한 고대 동아시아 서북부의 내력


 1. 한족과 호족의 구분은 혈통이 아니라 단지 정치적으로 구분되었던 것.

유라시아의 동쪽이 이른 바 한족으로 점령되기 이전에 우리나라의 서해바다에 끊임없이 탁류를 공급하는 황하유역의 상류를 조금 거슬러 올라가는 지역 지금의 신쟝 위구르 지역에 도달하면 이 지역이 2000년 전 사막의 초원지대로서 고대에는 이미 선사시대부터 수렵. 채집으로 부족을 이어 왔던 각 부족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목축을 하며 계절에 따라 여름에는 중앙아시아 깊숙히 또는 소련지역에 까지 갔다가 겨울이면 풀들을 따라 남하하여 중국 내륙에 까지 이어지는 광대한 행동반경을 가진 부족들이 흩어져 살았습니다. 이들 부족들 간의 생활물자의 조달은 원시공동체였던 이들이 고대 중앙아시아와 고대 북서중국지역과의 물물교환을 능통히 하였고 역사에 등장하는 슬라브족과 북중국의 적(賊)족과 혼혈이 되기도 했으므로 이들 부족들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파란 눈, 갈색 머리, 수염, 훤칠하고 길쭉한 체구, 흰색에 가까울 정도의 밝은 황색을 가졌게 되었기에 여러모로 오늘날의 극동의 황인종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외모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부족은 그 생활권이 조상대대로 중앙아시아와 중국대륙 북서부를 오르내리며 유랑생활을 하였습니다. 중국의 소수 부족들이 아직 이들 부족들과 같은 대추장의 단계에 있었을 때에는 오늘날과 전혀 반대로 오히려 이들 부족들의 영향하에 있었습니다. 이들의 역사는 자신의 문자를 통해 남겨 진 것이 없으므로 유라시아의 역사에서 동서양 공히 아무도 주목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시기에 황하 양자강에서 정착을 하여 농경을 하며 다르게 발전 해오던 중국의 대부족들이 급기야 북서 북중국의 대추장 사회를 능가하는 호족(豪族)사회로 발전하는 변동이 초래되었습니다. 중국내의 기존의 셀 수 없이 이합집산을 되풀이 하며 흥망성쇠를 무수히 거듭하던 추장 대추장 단위의 중소부족들의 근거지 곧 오늘날 중국 대륙의 주요 도시가 되었던 이들의 근거지를 이들 황화강호족(豪族)과 양자강호족(豪族)이 양분하여 관리하고 있다가 세계 여러 곳의 문명사에 나타나듯이 중국대륙 역시 황하강파의 정치적 단위가 중앙권력기관을 북위 37도 부근의 어느 곳에 두기로 하였을 때 그 북쪽 외곽에는 드디어 이들 부족의 남쪽 행동반경을 금지시키고 출입을 제한하는 정치적인 경계선을 제한하고 하나씩 둘씩 설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중국의 정치 단위는 이제는 그들의 북쪽 서북쪽 추운 지역으로 내 몰린 채 수렵 목축 극소의 경작으로 살게 된 유랑 부족들을 칭하여 융(戎)족, 적(賊 )족, 흉노(匈奴)족 등등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한족 중심의 역사기술로 이루어진 중국의 역사서에는 이들이 북서, 북 중국에 원래 살았던 원주민이 아니라 흉악한 야만족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개관적인 시각으로 되돌아가 살펴본다면 후일 이른 바 만리장성으로 불리게 되는 장성 이내에 거주하는 신분증이 있었던 주민들은 ‘한족’으로 불리게 되고 장성 바깥에서 고대의 생활을 계속해야했던 밀려난 주민들은 ‘호족’으로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원주민인 유랑족속들을 몰아내면서 정착민들을 독점적으로 보급한 그 결과로 황하강파는 양자강파에 비해 한층 중앙집권을 강화하게 되었고 이미 중앙집권적인 고대 국가의 토대를 구축하게 되었으니 황하강파는 기존의 양분하고 있던 중국대륙을 어느새 하나의 정치적 단위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중국대륙이 하나의 정치적 단위로 변모하였지만 고대에 중국대륙의 각 부족들을 자신들의 영향 하에 두고 있었던 유랑부족들은 곧잘 자신들의 터전으로 되돌아 오곤하였습니다. 그때마다 하나의 정치적 단위가 된 이들은 인공 경계벽을 강화하여야했습니다. 이제 호족이라 불리던 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장성이내의 땅을 밟아볼 수 있는 기회가 적어지게 되었습니다. 장성은 그렇게 높아지고 높아지고 철벽으로 변해만 갔습니다.  그리고 서로 이질적인 사회로 날로 변모해가게 되었고 장성이내의 한족 지역과 장성바깥의 호족지역은 문화적인 우열이 가속화되었고 한족에게서 중앙아시아 또는 슬라브족과 같은 오늘날의 백인의 특징은 소멸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원래는 ‘한족’과 ‘호족’은 정치적인 경계를 말하는 것이었지 지금과 같은 혈통을 의미하는 것이 절대 아니었던 것입니다.      

           

2. 한족의 북방민족에 대한 역사왜곡

사기. 한서등에 기재된 중국인 한족 중심의 역사기술에는 이들 중국 서북부 북부 동북부 민족들의 노략질이 심해서 방어성을 구축하였다고 하고 있고 이것은 죽 중국사서의 만리장성기원설을 뒷받침하는 철학을 제공하였습니다. 이것이 청나라까지 계속되어 만리장성이 되었습니다. 보수 개보수를 계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대사회가 전개되어 중국이 개방을 하고 철로가 중국과 중앙아시아 티벳을 달리게 되면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요? 이 지역의 통행에 장애를 주는 요소는 원래 없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단지 고대에는 지금보다 시간이 훨씬 많이 걸렸으므로 이 지역의 통행에 특별한 사유를 지녀야했으며 그 의지가 대단히 필요했을 것이라는 것을 상기시키지요. 그러나 오늘날에 날로 가속화되는 사막화를 바라보면 이 지역이 원래 만년 오천년 이전에도 사막지역이었는지 되물어 보아야합니다.  중구북서부와 중앙아시아의 과거는 우리의 생각과 다르게 녹지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사람들이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나무를 베고 벌목을 하고 녹지를 태워 없애므로 더 이상 사냥할 곳이 없어졌습니다. 문명 사회는 붕괴되었고 사람들은 떠났습니다. 현대에 들어서 지구온난화와 환경파괴로 사막화가 가속화되고 있지만 이쪽 지역의 개발 인프라를 통해 나타난 사실과 고대의 유물을 보면 사기. 한서가 기록하고 이 지역을 한때 점령하여 살았던 흉노와 같은 북방민족에 대해 야만인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은 엄연한 역사왜곡인 것입니다.   고대에 중국 서북부와 중앙아시아 사이에 또는 중국 북부에 경계선을 먼저 그은 자들은 한족이지 훈족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양자강 황하강 유역에 정착하여 농경을 성공적으로 일구어 내었던 서로 다른 동아시아인들이 황화지역 豪族 중심의 하나의 정치적 단위로 평정이 되고 사회의 규모가 여타의 지역에 비해서 대단위로 조성되자 타 지역에 비해서 문명의 비교 우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한족의 세력이 급팽창하여 문명화가 가속화 되자 유목 목축 수렵 채집에 의존하는 사회를 존속시켜야 했던 호(胡족)들은 차차 야만인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위에서 이야기 한 대로 호족들의 입장에 있어서는 생활권이 겹쳤던 중국 북. 서부의 광대한 지역에 이른바 인공장벽인 장성이 나타나 어느 날부터 언제부턴가부터 유랑민족들을 못 들어오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 반항하는 원주민들을 땅에서 한족이 추방하니 호족들에게는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생활의 터전을 잃고 그냥 밀려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한족이 잘살게 된 원인이 곡물재배였음을 호족들도 이제는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호족의 생활터전에서는 기껏해야 야생 보리 또는 밀정도가 재배됩니다.  그 나마 그 정도의 곡물생산지도 한 족이 대부분을 차지해 버렸습니다. 곡물은 인구수를 늘리고 세력을 키워 나가는데 아주 중요한 요소였지요. 한족이 자신들의 지배하에 있다가 갑자기 자신들의 위에 있게 된 원인을 호족들도 잘 압니다.  정착 농민인 한족들은 밀 보리 쌀의 효과적인 재배를 통해서 대추장이  호족으로 되고 이제는 왕이 되었습니다. 호족들이 목축을 하고 수렵으로 연명하고 채집수준의 밀을 얻는데 비해 강을 끼고 기름진 농촌을 끼고 있었던 한족들은 많은 인구를 유지하였고 이제 전투자원이 풍부합니다. 그래서 황하 양자강을 넘어 계속 팽창하여 원주민인 호족의 생활 터전을 절반을 차지하여버렸습니다. 장성에 가로막힌 호족들은 추운 들판에서 헤매야합니다. 그들은 과거가 그립습니다. 한족 마을을 습격합니다. 보복이 이루어집니다. 한족 마을은 정착하고 있기에 공격이 용이합니다. 한 족은 더 많은 전투병력을 이끌고 옵니다. 사기에는 한족에게 대항한 호족들을 흉노(匈奴)라는 악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흉악한 종놈들 새끼라는 뜻이 가장 어울릴 것입니다. 한나라 군대는 이 동양의 아파치를 대항해야 했습니다. 북아메리카에서 아파치는 백인들에게 거의 몰살되다시피 하였지만 흉노는 장성을 넘지 못하고 대부분의 부족이 눈물을 머금고 중앙아시아에서 서쪽으로 가 장성이 없는 유럽으로 갔습니다.  소수의 부족은 살기가 가장 척박한 곳 한족의 군대가 찿을 수 없는 멀고 험준한 곳으로 으로 흩어졌습니다.


3. 동양의 백색도살자 강족의 등장

고대 중국인들이 베이징에 수도를 두었다고 하더라도 베이징에서 동북부인 한반도는 노력만하면 도달하는 가까운 거리이다. 그리고 남은 유일한 자연 장벽은 태평양을 마주하는 것이므로 더 갈 필요가 없다.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낼 지라도 현실적인 중국인들에게 더 이상 모험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킬 수가 없다. 그러나 서부는 다르다. 황하 양쯔만 바라보고 살던 고대 중국 베이징의 사람들은 국경이 넓어졌고 시야가 원대해졌습니다. 더 나아가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서남지역으로는 세계최고봉이 버티고 있으니 대규모의 군대가 갈수가 없습니다. 서부에는 천산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또한 중국 땅을 요새화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으므로 아랍이나 인도 로마의 세력들이 중국으로 진출하는데 장애가 되었습니다. 남중국으로 대규모 해군이 나가지도 못하며 외부의 세력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은 그 자체가 하나의 요새입니다.  그러나 길이 있습니다. 서북쪽은 사막일 뿐이지 군대가 지나갈 수 있는 곳입니다. 한나라 시대에 들어 한족은 드디어 장건을 필두로 하여 중국의 서북부 사막을 가로질러 나갈 생각을 하였습니다. 환상에 도전하였습니다. 한족의 군대가 점차 사막에 풀렸습니다. 많은 한족들이 사막으로 몰려들었고 교역을 하였습니다. 중국역사에서 서부개척이라는 낭만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흉노가 버리고 간 북서부의 황량한 사막에는 아직도 뿔뿔이 잔당을 이루는 부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족의 중국 북서부로의 팽창은 이곳 원주민들에게는 미국 개척시대의 미국 기병대가 진주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한족에게 이들 부족은 사냥감이었습니다. 그러나 원주민들에게는 한족에게 밀려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습니다. 서쪽에는 다른 부족들이 이미 큰 세력을 이루고 있었기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한족이 군대를 파견할수록 서북 지역의 부족들은 점차 연합하고 단결하게 되었습니다. 한족의 군대와 싸우게 되었습니다. 한족의 군대는 최종지휘부가 베이징에 있었으므로 한족의 입장에서 먼 곳에 있는 일선부대를 관리하기도 벅찼습니다. 그런데 한족의 지휘부가 내란이 일어났습니다. 동한의 정치적인 혼란이 생겨버린 것입니다. 서북지역의 부족으로서는 뜻밖의 부흥의 기회가 생겼습니다. 후한의 정치적 혼란은 중국 서북부에 티벳족 저족 강족 갈족 등등의 부족들이 급성장하여 이들 부족이 초원의 생활을 뒤로하고 한나라의 군대가 왔던 길을 역주행하여 따라 들어왔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 자기들의 선조 선조들이 유랑하며 다녔던 곳이니까 사실은 새로울 것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한족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을 호족의 침략이라 생각하였습니다. 한족에게는 서쪽에서부터 온 강족의 존재는 너무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당인들은 오행상 서방 백색 금기라서 강족이 실제 북유럽의 순수한 백인이 아니었을 것인데도 백색도살자라고 했습니다. 한족들에게는 한족들에게 주는 강족의 이미지는, 마치 농경을 하던 고대 유럽인들에게 북쪽에서 내온 북유럽의 켈트인들이나 바이킹의 전설과 맞먹는 정도로 공포 그 이상이었으며 결코 그 이하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4. 최후를 눈 앞에 두고 있는 강족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

사람들미국의 백인 유럽인들에게 미국 신대륙의 개척이 낭만주의 시대를 말하는 것이라면 반대로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는 잔혹한 죽음의 서사시기에 해당되는 것임을 이제 알고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미서부개척 시대는 유럽인들이 아파치 마파치 코만치와 같은 용맹한 인디언 전사들을 도륙하여 신대륙을 차지해 가는 낭만이 가득한 곳이었고 인디언에게는 통한의 역사이므로 신대륙개척 그 이면에는 아메리카 대륙 인류역사상 피를 부르며 살육이 그리고 점령의 기쁨이 공존하는 잔혹한 시기였습니다. 당시 유럽인들의 관점에서는 그 누구도 서부개척시대의 낭만에 대하여 아무도 섣불리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백인이면서도 인디언의 관점에서 한 인디언 종족의 혈통이 지상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게 되는 혈통단절의 비애에 관한 소재를 문학적으로 남긴 이가 있었으니 모히컨족 덩컨의 스토리를 글로 전해준 그 책의 이름이 바로 “모히컨족의 최후”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Last Mohikhan"이라는 제목의 헐리우드 영화가 상영된 적이 10여년 전의 일입니다. 더 이상 역사기록을 가질 수 없는 인디언 부족들은 자신들의 최후를 스스로 기록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라스트모히칸은 서부극의 하나쯤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아무런 의미를 남기지 못한채 우리 곁을 스쳐지나갔습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인디언 보호구역은 아파치 마파치 코만치와 같은 용맹한 인디언 전사의 노예나 앞잡이 정도로 여겨지던 쑤, 나바호 ..등등의 족속들이 살아남아 인디언의 혈통을 지키고 있습니다. 헐리우드에 진출한 대부의 말론. 브란도가 인디언처우개선을 외쳤다가 잘린적이 있었지요.  오늘날의 창족의 비애는 이런 것입니다. 창족 중 그 누구도 자신들의 민족 여정을 자신들의 언어로 유창하게 표현해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창족은 과거의 한 때에 유럽의 켈트, 바이킹과 같은 강인한 전사들의 후예로써  한족이 그렇게 강인한 우리 선조들을 미국ㄱ의 아파치 마파치 같이 완전히 몰살시키지 못하고, 만리장성의 이내로 불러들여 ”창족자치구“ 속에서 자유롭게 살게하였습니다. 우리들은 한족의 2000년에 걸친 동화정책에도 불구하고 고유의 풍속과 언어를 유지하여 생존하였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동화정책으로 우리의 모습은 한족과 다름없게 변하였고 자치구는 비록”창족보호구역“으로 격하되었지만 20만이 넘게 생존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세기의 대지진이라는 쓰촨 대지진이라는 엄청난 자연재해를 만나 민족의 최후를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창족은 그 찬란했던 조상들의 무용담으,f 뒤로하고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지구상의 소멸민족의 하나가 되어린 것입니다. ..‘ 라고,

한족의 완벽한 피지배 민족으로 전락해 버린 그들에게는 더 이상 유럽인들의 특징이나 황인종 유럽인들의 혼혈인 같은 특징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한족은 아시아의 백인 창족을 도태시켰습니다. 미국의 백인들은 미국의 황인종을 도태시켰습니다. 공통적인 점은 결국 “보호구역”에 들어가서 살게 하고 희석시키고 사라지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화북지방의 한족들은 동북지방의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동화시키고  도태시켰습니다. 오늘날은 고구려의 완벽한 흔적은 찿기 힘듭니다.  고구려 유민이 그나마 남하를 계속하여 한반도 이북에서는 그 기상과 전설이 계승되어 왔습니다. 저희 의 조상도 실은 고구려에서 남하하여 진주에 정착하여 본을 갖고 있게 되었습니다.          


5. 불행히도 중국에서 소수민족을 보호하는 정책이란,

말이 소수민족을 보호하는 정책이지 사실은 이민족의 한족 동화정책에 불과한 것입니다. 식민지개척 시대 미국인들이 거주지사수를 위하여 극렬히 저항하는 인디언부족들을 기병대를 동원하여 저항하는 혈통을 몰살시켜 버린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인디언들은 도망을 갈 수가 없었으니까요 서부로 가도 가도 태평양에 도착하면 끝이니까 죽음밖에는 도리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캐나다를 통하여 베링해를 다시 넘어 아시아로 돌아올 수는 없었고, 그러나 중국의 서쪽은 중앙아시아와 서쪽으로 중동 남쪽으로 인도 또 로마가 끊임없이 나옵니다 천하의 고대 중국이라 해도 이들 나라를 혼자서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주변 민족을 몰살해 가지고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중국 주변의 이민족에게 그 군사권을 박탈하고 외교권을 박탈하고 거주지를 제한시키고 고립을 시키고 문맹화시키고  그 사회의 중심에 한족을 서서히 이주시켜 한족의 혈통을 점차 주입시킵니다.  결국 중국 내의 소수민족이 되는 동시에 한족으로 됩니다. 2000년 동안 그런 방식이 진행돼 온 것입니다. 그런데 소수민족의 형식은 반드시 유지시켜 줄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주변지역을 점차 중국화하는데 소수민족의 기여가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소수민족은 대부분 과거 그 지역의 한 왕국을 건설했던 민족들이고 그들은 광대한 땅을 지배하였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 지역의 사정에 누구보다도 밝고 토착화 되어있습니다. 유명한 소수민족들은 또한 그 주변국가에 동포가 대서 국가를 이루며 살고 있지요. 그 주변의 국가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거나 후일 점령을 한다거나 배후에서 조종을 하려고 자 한다면 한족이 앞에서 설치는 것보다 소수민족이 앞장서게 하는 것이 매우 유리하다는 것을 한족들은 지난 수 천년의 경험에서 터득한 비법인 것입니다. 남한사회에서 조선족이 하는 역할을 유심히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6. 국제사회는 미래의 인류를 위하여 세계의 소수민족을 보호하자고 나섰습니다.

국제사회는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가까스로 세계의 원주민 소수민족의 보호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장 간단하면서도 극단적인 예를 든다면 지구의 모든 사람들이 소수민족과 같은 생활 방식으로 산다면 지구멸망은 절대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번 W에서도 현대인 현대사회의 극히 부분적으로나마 지구의 유한자원의 사용을 최소화 하면서 살아가는 영국의 한 실험마을 이야기가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에 태어나고 물 들은 우리가 원주민들의 생활 방식을 얼마나 흉내 내고 따라 갈 수 있겠습니까?. 원주민들이 인류의 생활환경에 기여하는 가치 소수민족이 공동체의 운영에 기여하는 정신적인 가치를 좀 더 자세히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인데 그런 원주민들이 소수민족이 연구를 미처 하기도 전에 사라져 버린 다면 얼마나 허망한 일이 될까요? 과거 식민주의의 먹잇감이라는 이름의 원주민 소수민족 이제는 산업자본주의의 전지구적 병폐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줄 모법 답안을 갖고 있는지 모릅니다. 티벳족 위글족 창족 만주족 들을 국제사회가 이제는 보호해 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샤르코지가 달라이라마를 만난 것은 참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중국속의 아파치족의 전설 창족이 이번 대지진으로 소멸되지 않고 미래에도 그들의 전통이 이어지길 기대해 봅니다. 우리에게는 또 다른 고구려의 후예수준으로 비취지기 때문에 특별한 관심이 쏠리기도 하지만, 인류가 20세기 초반에 경험한 나찌의 게르만 우월주의, 스탈린의 공산주의독재망령, 일본의 동아시아제국주의, 지금 진행되고 있는 자유방임산업자본주의의 불확실한 미래를 이끌어줄 대안이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미래의 공존을 도모하는 것이 불확실성을 딛고 안정된 길을 향해 나가는 길이라면, 소수민족의 보호는 발등에 떨어진 불로서 인류가 공존을 위해 나가기 위한 첫 관문이되는 것입니다.

    

7. 결론

W속의 대지진, 그 속에 희생된 창족(羌族)에 대한 언급은 후일 영상기록으로 남을 것입니다. 위에서 장황하게 이야기 한 대로 중국 한족들의 소수민족으로 전락한 강족이 중국인들의 전시행정에 의하여 그 본 모습은 사라진 채 세계 지성의 관심에서 벗어나서 단지 공연이나 하고 구경꺼리나 되어진 처지는 우리가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는 한 층 장기적이고 밀착된 취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W의 장점을 더 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기존의 언론 매체에서 전해주는 World Report가 현지국가에서 던져주는 박제화된 정보를 그냥 한국민들에게 퍼나르기 식으로 전달해 주는 것에 대해서 별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쳐다보기만 하였습니다. 이 W의 방식은 그런 방식과 조금 다른 면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시청자들의 의견을 받아서 세계의 시사현장에 곧장 들어가므로 무의미하고 상투적인 외신보도와는 다른 의미가 있었습니다. W가 좀 더 진화한다면 아마 세계의 문명학자들이 언젠가는 대재앙 속에 소멸해 가는 그들의 창족의 남겨진 이야기들을 유심히 살펴 볼 것입니다. 비록, 그 이전에 현재의 현대중국이 민주화 되고, 선진화 되어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의 리더로서 거듭나야 된다는 전제가 받드시 필요한 것임은 둘째로 하고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