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늙은 친구'는 딸애가 다녀가면 오줌을 지립니다
오마이뉴스 | 기사입력 2008.12.08 09:57
[[오마이뉴스 김관숙 기자]
"아이구, 또네."
나란히 걸어가던 이웃 친구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울상을 짓는가 하더니 얼른 장을 본 불룩한 장바구니를 내게 맡기고 새로 단장한 주민센터 건물로 뛰어갑니다. 오줌을 지렸나 봅니다. 1층에 깨끗한 화장실이 있는 주민센터 건물 앞에서 오줌을 지렸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 실수를 할 뻔 했습니다.
친구와 나는 동네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다가 만나서 같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친구에겐 지난 봄부터 가끔씩 오줌을 지리는 증세가 있습니다. 갑자기 오줌이 마려운가 하는 순간에 자신도 모르게 찔끔 지리는 것입니다. 참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친구는 그런 증세를 늘 끼고 살지는 않습니다. 스트레스를 몹시 받을 때만 그런 황당한 증세가 나타납니다. 친구의 말로는 지난 봄에 지방에서 살던 딸이 이웃 동네로 이사를 온 후부터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보통 때는 멀쩡하다가도 꼭 딸이 다녀간 후면 이삼일 간 오줌을 참지 못하게 되면서 지리는 증세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 딸은 예쁘고 착합니다. 성격도 명랑하고 '쿨'합니다. 결혼을 해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두었지만 처녀 때와 다름없이 눈빛도 맑고 예쁩니다. 부모에게 전화도 자주 하는 편인데다 친정에 올 때는 언제나 빈손으로 오지 않고 과자 한 봉지라도 들고 오는 효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친정에 왔다가 돌아갈 때는 열에 7, 8번은 심술쟁이처럼 볼이 잔뜩 부어서 갑니다.
딸애는 머리가 반백인 어머니와 같이 맛있게 점심을 해 먹고 웃고 떠들고 즐겁게 이야기를 하다가도 어릴 적에 어떤 좋지 않던 모습을 떠올리게끔 하는 이야기나 TV화면을 보게 되면 바로 눈을 하얗게 뜨고는 분을 참지 못하면서 어머니의 작고 빈약한 가슴에 비수를 꽂았습니다.
"그때 동아참고서 오빠 먼저 사줬잖아. 그 비싼 바나나도 나 모르게 오빠 한 개 더 주고! 운동화도 꼭 오빠 먼저 사주고. 내 것도 새는데. 시어머님이 그러대. 내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고. 그런 말 듣는 거 다아 엄마 탓이야, 엄마 탓!"
제 감정에 못 이겨 부르르 현관을 나서는 딸의 뒷모습을 보며 유난히 흰머리가 많고 어깨가 굽은 친구는 울상이 됩니다. '어유 저것이 언제 철이 드나.' 친구는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쿵쿵 쳤습니다.
그때 아들에게 바나나 한 개 더 주게 된 건 한 개 남은 것을 친구가 먹으려고 막 껍질을 벗기는데 그새 제 것을 다 먹고 나서 더 먹고 싶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아들이 안쓰러워서 그냥 건네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바나나가 비싸고 귀했습니다. 아이들은 한 개만 먹어도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던 시절입니다.
딸의 하소연... 엄마는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칩니다
친구가 주민센터 건물에서 나왔습니다. 친구는 장바구니를 받아들더니 피식 웃습니다. 우리는 잔디밭을 덮은 낙엽들을 보면서 천천히 걸음을 놓습니다.
"이번엔 또 뭐야?"
"며칠 전에 미국유학 갔던 지 시누이가 돌아왔어. 그 말끝에 왜 오빠만 미국유학 시켜주고 저는 안 시켜줬냐고 막 울구불구 쏘아대더라구. 그때 유학 보낼 형편이 아니었던 거 알지? 아이구 고 '속아지' 땜에 아무래도 난 내 명대로 못 살 것 같아!"
친구의 아들애가 대학 2학년 때입니다. 아들애가 고등학교 때부터 그동안 받은 용돈과 악착같이 별별 아르바이트를 다 해서 번 돈을 저축한 통장을 내보이면서 '외국 유학을 가고 싶어서 열심히 모았다'고 했을 때 친구는 슬며시 천장을 올려다보고 핑 도는 눈물을 감추었습니다. 통장을 보여주면서 자랑스러워 하는 아들의 모습에서는 찬란한 장래가 엿보였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유학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친구는 아들이 유학을 하는 동안 여러 가지 일을 했습니다. 시간제 아이 봐주기는 일상이나 마찬가지였고 초여름이면 마늘, 가을이면 반시 건고추 따위들을 시골 친정 동네에서 승용차에 몇 번이고 가득 가득 싣고 와서는 이웃들에게 팔았습니다.
"신경 쓰지 말구 그러려니 해."
"아들애만 유학 보낸 내 속은 편안했겠어? 아들애가 유학하는 동안 난 불쌍할 정도로 딸애 눈치만 보구 살았다구. 그런 어미 속을 알아주기는커녕 속을 홀라당 뒤집어놓는 거야. 걘 학교 다닐 때 도시락 반찬 투정도 얼마나 했나 몰라. 시집 가서 자식 낳고 살면 달라지려니 했는데 여전하단 말야."
나도 자식들이 학교 다닐 때 도시락을 싸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지금은 웰빙 어쩌고 하면서 일부러 안 먹는 사람들도 많지만 사십을 바라보는 자식들이 어렸던 그 시절에는 소시지 조림이 훌륭한 도시락 반찬이었습니다. 어쩌다가 소시지에 칼금을 예쁘게 넣어 정성껏 조림을 하거나 홍당무 채가 들어간 꽃 같이 화사한 계란말이 같은 것을 도시락 반찬으로 넣어 주는 날이면 나는 종일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어구 차라리 안 보구 살았으면 좋겠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때뿐이라면서."
"그때뿐이긴 허지. 며칠 뒤에 멀쩡한 얼굴로, 아주 멀쩡한 얼굴로 와서는 엄마 어쩌구 저쩌구 한다구."
"그러니까 자식이지 뭐. 근데 말야, 난 자식들이 생각없이 늙은 부모한테 막 쏘아대거나 사사건건 참견을 해대면 보리자루처럼 말이 없어지거나 주눅이 들어 치매끼가 생긴다는 말은 들었어도 오줌 지린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구."
"처음엔 나두 주눅이 들었었다구. 그러다가 그러면 우울증이나 치매끼가 생길 것 같아 무조건 '그래 미안하다 그래 그것두 미안하다 미안해'라구 했지. 그래두 퍼붓는 거야. 얼마나 억울하고 분하던지 냉수를 벌컥 거리는데 갑자기 찔끔 나오는 거야. 그러더니 걔가 퍼붓던 생각만 하면 오줌이 마렵고 그 지경이 되더라구. 마치 시험시간 종이 울리면 화장실에 가고 싶어지듯이 말야. 그 집 딸은 안 그러지?"
나는 그냥 웃기만 합니다. 이런저런 소소한 말끝에 철없던 지난 날에 있었던 소소한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그것도 제 처지에서만 정리한 대로, 원망조로 '엄마가 그때 그랬잖아'하고 친정어머니의 속을 홀랑 뒤집어 놓지 않는 딸이 사방에 몇이나 될까.
"엄마가 그때 그랬잖아"... 속 뒤집어 놓지 않는 딸, 얼마나 될까요
또 다른 친구의 하소연이 생각납니다. 아침에 딸이 전화로 '엄마 오늘 우리 막내 좀 봐 줘요' 해서 '오늘 안 되는데, 점심모임 있는 날이거든' 했더니 그대로 전화를 찰칵 끊더라고 하더군요. 그래도 이제는 겁을 먹지 않는다고, 겁을 먹어봤자 나만 스트레스 받아 여기저기가 아프게 된다며 딸애가 그러거나 말거나 무시하고는 내 스케줄대로 산다는 그 친구는 그래도 용단이 있습니다.
나도 용단이 있는 편에 속합니다. 세월이 제 마음대로 흘러서 할 수 없이 만나게 된 노후, 깊은 가을과 다름이 없는 노후를 보내는 이제는 나도 온전한 '나' 이고 싶은 것입니다. 자식들의 일상에 내 일상이 한 시간이라도 희생되는 것이 싫어졌습니다. 내 체력이, 근력, 기력이 이제는 그러지 말라고, 힘에 부치지 않느냐고, 자신을 위해서 시간을 가지며 살아보라고,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수시로 일깨워 주기도 합니다.
친구도 나도 하고 싶은 무엇이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예쁘게 크는 자식들이 귀엽고 기특해서 내 안에 그 소리들을 참고 살았습니다. 중년이 되어서도 참았습니다. 튀어나갈 푸른 문이 훤히 보였지만 자식들 대학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참았습니다. 참고 또 참다가 보니까 노년이 되었습니다. 건강도 나빠졌습니다.
누구는 퇴행성 무릎관절 통증이 심해져서 하루에 한 알 먹던 진통 소염제를 두 알씩 먹다가는 지팡이를 짚고 다니고, 누구는 백내장 수술을 받았고, 누구는 허리 디스크 통증이 심해 수술을 받고 싶어도 이제는 체력이 수술을 견뎌내지 못한다고 해서 못 받고.
친구도 백내장 수술을 받았습니다. 친구의 남편은 당뇨를 앓고 있습니다. 또 언제 무슨 병이 생겨서 병원을 들락거리게 될지를 모릅니다. 아니 이미 한 가지가 늘었습니다. 딸애가 가끔씩 속을 홀라당 뒤집어 놓아 오줌을 지리는 것도 아픔인 것입니다. 문득 친구가 말했습니다.
"지난번에 < 베토벤 바이러스 > 보다가 막 울었다구. 송옥숙이가 항변하는 말에 말야. 봤어?"
"나도 눈물이 났어."
< 남편이랑 애들은 지들 하고 싶은 대로 맘껏 하고 살면서 왜 나만 참아야 하는데 왜! 나 계속 참았다고 몇 십년을. 나 이러다 평생 오케스트라 못해. 왜 나만 참아야 하냐고 왜 왜! >
그 항변은 바로 내 가슴속에서 튀어나온 불덩이였습니다. 그때 나는 아무 소리도 안 들렸습니다. 아무것도 안 보였습니다. 내가 바로 송옥숙이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속이 시원했는지, 후련했는지 모릅니다. 친구 역시 반짝 그랬을 것입니다.
'송옥숙'의 항변, 가슴이 후련해졌습니다
그러나 속이 후련해졌다고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드라마 속에서 송옥숙이는 다시 첼로를 잡았지만 여전히 친구는 오줌을 지리고 나는 새벽에 일어나 새벽 수영을 하고 돌아오는 남편을 위해 아침을 준비하고 장을 봐오고 광고지에서 세일 품목을 체크해 두고 뭔가 억울하고 분하고 답답하면 간식이며 스틱을 챙겨 가지고 한강 둔치 게이트볼 구장으로 달아나 버립니다.
지금도 튀어나갈 푸른 문이 보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젊은 시절처럼 손에 잡힐듯이 저만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만 있습니다. 머리가 무얼 자꾸 까먹는 골통으로 변한데다가 축 처진 어깨가 말해주듯이 체력까지 따라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친구의 눈치를 보며 말했습니다.
"집에만 있지 말고 게이트볼 배워. 공 치는 동안엔 뭐든 다 잊어먹는단 말야. 운동만 되는게 아니구 스트레스가 확 풀려."
그러나 친구의 입에서는 전혀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냥 퍼붓게 내버려 둘 거야. 그렇게라두 상처를 씻어내게 해야지. 그러다 보면 성숙해지고 깨닫게 되겄지 뭐. 대신 이제부터는, 내 건강을 위해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는 흘려버릴 거야."
나는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친구는 깊고 깊은 모성으로 딸애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부 다 안아주기로 한 것입니다.
잔디밭을 덮은 낙엽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내가 낙엽들을 바라보며 말없이 걷기만 하자 친구가 웃으면서 시조를 읊듯이 말했습니다.
"이렇게 사는 거지 뭐."
기가 막혀서, 자식이 뭔지. 그래도 그렇지, 이 나이에 왜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아이구, 또네."
나란히 걸어가던 이웃 친구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울상을 짓는가 하더니 얼른 장을 본 불룩한 장바구니를 내게 맡기고 새로 단장한 주민센터 건물로 뛰어갑니다. 오줌을 지렸나 봅니다. 1층에 깨끗한 화장실이 있는 주민센터 건물 앞에서 오줌을 지렸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 실수를 할 뻔 했습니다.
친구와 나는 동네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다가 만나서 같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친구에겐 지난 봄부터 가끔씩 오줌을 지리는 증세가 있습니다. 갑자기 오줌이 마려운가 하는 순간에 자신도 모르게 찔끔 지리는 것입니다. 참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친구는 그런 증세를 늘 끼고 살지는 않습니다. 스트레스를 몹시 받을 때만 그런 황당한 증세가 나타납니다. 친구의 말로는 지난 봄에 지방에서 살던 딸이 이웃 동네로 이사를 온 후부터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보통 때는 멀쩡하다가도 꼭 딸이 다녀간 후면 이삼일 간 오줌을 참지 못하게 되면서 지리는 증세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 딸은 예쁘고 착합니다. 성격도 명랑하고 '쿨'합니다. 결혼을 해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두었지만 처녀 때와 다름없이 눈빛도 맑고 예쁩니다. 부모에게 전화도 자주 하는 편인데다 친정에 올 때는 언제나 빈손으로 오지 않고 과자 한 봉지라도 들고 오는 효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친정에 왔다가 돌아갈 때는 열에 7, 8번은 심술쟁이처럼 볼이 잔뜩 부어서 갑니다.
딸애는 머리가 반백인 어머니와 같이 맛있게 점심을 해 먹고 웃고 떠들고 즐겁게 이야기를 하다가도 어릴 적에 어떤 좋지 않던 모습을 떠올리게끔 하는 이야기나 TV화면을 보게 되면 바로 눈을 하얗게 뜨고는 분을 참지 못하면서 어머니의 작고 빈약한 가슴에 비수를 꽂았습니다.
"그때 동아참고서 오빠 먼저 사줬잖아. 그 비싼 바나나도 나 모르게 오빠 한 개 더 주고! 운동화도 꼭 오빠 먼저 사주고. 내 것도 새는데. 시어머님이 그러대. 내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고. 그런 말 듣는 거 다아 엄마 탓이야, 엄마 탓!"
제 감정에 못 이겨 부르르 현관을 나서는 딸의 뒷모습을 보며 유난히 흰머리가 많고 어깨가 굽은 친구는 울상이 됩니다. '어유 저것이 언제 철이 드나.' 친구는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쿵쿵 쳤습니다.
그때 아들에게 바나나 한 개 더 주게 된 건 한 개 남은 것을 친구가 먹으려고 막 껍질을 벗기는데 그새 제 것을 다 먹고 나서 더 먹고 싶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아들이 안쓰러워서 그냥 건네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바나나가 비싸고 귀했습니다. 아이들은 한 개만 먹어도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던 시절입니다.
딸의 하소연... 엄마는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칩니다
친구가 주민센터 건물에서 나왔습니다. 친구는 장바구니를 받아들더니 피식 웃습니다. 우리는 잔디밭을 덮은 낙엽들을 보면서 천천히 걸음을 놓습니다.
"이번엔 또 뭐야?"
"며칠 전에 미국유학 갔던 지 시누이가 돌아왔어. 그 말끝에 왜 오빠만 미국유학 시켜주고 저는 안 시켜줬냐고 막 울구불구 쏘아대더라구. 그때 유학 보낼 형편이 아니었던 거 알지? 아이구 고 '속아지' 땜에 아무래도 난 내 명대로 못 살 것 같아!"
친구의 아들애가 대학 2학년 때입니다. 아들애가 고등학교 때부터 그동안 받은 용돈과 악착같이 별별 아르바이트를 다 해서 번 돈을 저축한 통장을 내보이면서 '외국 유학을 가고 싶어서 열심히 모았다'고 했을 때 친구는 슬며시 천장을 올려다보고 핑 도는 눈물을 감추었습니다. 통장을 보여주면서 자랑스러워 하는 아들의 모습에서는 찬란한 장래가 엿보였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유학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친구는 아들이 유학을 하는 동안 여러 가지 일을 했습니다. 시간제 아이 봐주기는 일상이나 마찬가지였고 초여름이면 마늘, 가을이면 반시 건고추 따위들을 시골 친정 동네에서 승용차에 몇 번이고 가득 가득 싣고 와서는 이웃들에게 팔았습니다.
"신경 쓰지 말구 그러려니 해."
"아들애만 유학 보낸 내 속은 편안했겠어? 아들애가 유학하는 동안 난 불쌍할 정도로 딸애 눈치만 보구 살았다구. 그런 어미 속을 알아주기는커녕 속을 홀라당 뒤집어놓는 거야. 걘 학교 다닐 때 도시락 반찬 투정도 얼마나 했나 몰라. 시집 가서 자식 낳고 살면 달라지려니 했는데 여전하단 말야."
나도 자식들이 학교 다닐 때 도시락을 싸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지금은 웰빙 어쩌고 하면서 일부러 안 먹는 사람들도 많지만 사십을 바라보는 자식들이 어렸던 그 시절에는 소시지 조림이 훌륭한 도시락 반찬이었습니다. 어쩌다가 소시지에 칼금을 예쁘게 넣어 정성껏 조림을 하거나 홍당무 채가 들어간 꽃 같이 화사한 계란말이 같은 것을 도시락 반찬으로 넣어 주는 날이면 나는 종일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어구 차라리 안 보구 살았으면 좋겠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때뿐이라면서."
"그때뿐이긴 허지. 며칠 뒤에 멀쩡한 얼굴로, 아주 멀쩡한 얼굴로 와서는 엄마 어쩌구 저쩌구 한다구."
"그러니까 자식이지 뭐. 근데 말야, 난 자식들이 생각없이 늙은 부모한테 막 쏘아대거나 사사건건 참견을 해대면 보리자루처럼 말이 없어지거나 주눅이 들어 치매끼가 생긴다는 말은 들었어도 오줌 지린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구."
"처음엔 나두 주눅이 들었었다구. 그러다가 그러면 우울증이나 치매끼가 생길 것 같아 무조건 '그래 미안하다 그래 그것두 미안하다 미안해'라구 했지. 그래두 퍼붓는 거야. 얼마나 억울하고 분하던지 냉수를 벌컥 거리는데 갑자기 찔끔 나오는 거야. 그러더니 걔가 퍼붓던 생각만 하면 오줌이 마렵고 그 지경이 되더라구. 마치 시험시간 종이 울리면 화장실에 가고 싶어지듯이 말야. 그 집 딸은 안 그러지?"
나는 그냥 웃기만 합니다. 이런저런 소소한 말끝에 철없던 지난 날에 있었던 소소한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그것도 제 처지에서만 정리한 대로, 원망조로 '엄마가 그때 그랬잖아'하고 친정어머니의 속을 홀랑 뒤집어 놓지 않는 딸이 사방에 몇이나 될까.
"엄마가 그때 그랬잖아"... 속 뒤집어 놓지 않는 딸, 얼마나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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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용단이 있는 편에 속합니다. 세월이 제 마음대로 흘러서 할 수 없이 만나게 된 노후, 깊은 가을과 다름이 없는 노후를 보내는 이제는 나도 온전한 '나' 이고 싶은 것입니다. 자식들의 일상에 내 일상이 한 시간이라도 희생되는 것이 싫어졌습니다. 내 체력이, 근력, 기력이 이제는 그러지 말라고, 힘에 부치지 않느냐고, 자신을 위해서 시간을 가지며 살아보라고,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수시로 일깨워 주기도 합니다.
친구도 나도 하고 싶은 무엇이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예쁘게 크는 자식들이 귀엽고 기특해서 내 안에 그 소리들을 참고 살았습니다. 중년이 되어서도 참았습니다. 튀어나갈 푸른 문이 훤히 보였지만 자식들 대학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참았습니다. 참고 또 참다가 보니까 노년이 되었습니다. 건강도 나빠졌습니다.
누구는 퇴행성 무릎관절 통증이 심해져서 하루에 한 알 먹던 진통 소염제를 두 알씩 먹다가는 지팡이를 짚고 다니고, 누구는 백내장 수술을 받았고, 누구는 허리 디스크 통증이 심해 수술을 받고 싶어도 이제는 체력이 수술을 견뎌내지 못한다고 해서 못 받고.
친구도 백내장 수술을 받았습니다. 친구의 남편은 당뇨를 앓고 있습니다. 또 언제 무슨 병이 생겨서 병원을 들락거리게 될지를 모릅니다. 아니 이미 한 가지가 늘었습니다. 딸애가 가끔씩 속을 홀라당 뒤집어 놓아 오줌을 지리는 것도 아픔인 것입니다. 문득 친구가 말했습니다.
"지난번에 < 베토벤 바이러스 > 보다가 막 울었다구. 송옥숙이가 항변하는 말에 말야. 봤어?"
"나도 눈물이 났어."
< 남편이랑 애들은 지들 하고 싶은 대로 맘껏 하고 살면서 왜 나만 참아야 하는데 왜! 나 계속 참았다고 몇 십년을. 나 이러다 평생 오케스트라 못해. 왜 나만 참아야 하냐고 왜 왜! >
그 항변은 바로 내 가슴속에서 튀어나온 불덩이였습니다. 그때 나는 아무 소리도 안 들렸습니다. 아무것도 안 보였습니다. 내가 바로 송옥숙이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속이 시원했는지, 후련했는지 모릅니다. 친구 역시 반짝 그랬을 것입니다.
'송옥숙'의 항변, 가슴이 후련해졌습니다
그러나 속이 후련해졌다고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드라마 속에서 송옥숙이는 다시 첼로를 잡았지만 여전히 친구는 오줌을 지리고 나는 새벽에 일어나 새벽 수영을 하고 돌아오는 남편을 위해 아침을 준비하고 장을 봐오고 광고지에서 세일 품목을 체크해 두고 뭔가 억울하고 분하고 답답하면 간식이며 스틱을 챙겨 가지고 한강 둔치 게이트볼 구장으로 달아나 버립니다.
지금도 튀어나갈 푸른 문이 보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젊은 시절처럼 손에 잡힐듯이 저만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만 있습니다. 머리가 무얼 자꾸 까먹는 골통으로 변한데다가 축 처진 어깨가 말해주듯이 체력까지 따라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친구의 눈치를 보며 말했습니다.
"집에만 있지 말고 게이트볼 배워. 공 치는 동안엔 뭐든 다 잊어먹는단 말야. 운동만 되는게 아니구 스트레스가 확 풀려."
그러나 친구의 입에서는 전혀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냥 퍼붓게 내버려 둘 거야. 그렇게라두 상처를 씻어내게 해야지. 그러다 보면 성숙해지고 깨닫게 되겄지 뭐. 대신 이제부터는, 내 건강을 위해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는 흘려버릴 거야."
나는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친구는 깊고 깊은 모성으로 딸애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부 다 안아주기로 한 것입니다.
잔디밭을 덮은 낙엽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내가 낙엽들을 바라보며 말없이 걷기만 하자 친구가 웃으면서 시조를 읊듯이 말했습니다.
"이렇게 사는 거지 뭐."
기가 막혀서, 자식이 뭔지. 그래도 그렇지, 이 나이에 왜 그렇게 살아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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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절에서 들은 부처님 말씀 :
아무리 부처님께 잘해서 향 피우는 연기가 온 지구를 다 덮는다 해도 부모께 잘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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