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말씀

육신을 떠나면서

그대로 그렇게 2008. 9. 27. 11:55

이제 죽어감의 바르도가 내게 다가옴에 따라

나는 온갖 집착, 갈망, 애착을 버리겠노라.

조금도 흩어짐없이 명료하게 가르침을 알아차리고

불생(不生)하는 리그파 영역에 내 의식을 분출하리니

살과 피의 복합체, 이 육신을 떠나게 되니까

그것이 덧없는 환상인 줄 알겠노라.

 

 현재 우리의 몸은 분명히 우주 전체의 중심이다. 우리는 아무 생각없이 자기의 몸을 자기 자신, 우리의 자아라고 간주한다. 그리고 이처럼 잘못된 연상은 그것이 사멸될 수 없는 것이며 확실한 존재라는 환상을 계속해서 강화시킨다. 우리의 몸은 너무나 확실하게 존재하는 듯해서 <나>도 존재하는 것 같고, <너>라는 존재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투사하기를 결코 멈추지 않는, 전적으로 환상에 불과한 이 이원론적인 세계는 확실하게 실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죽을 때, <나>라고 일컬어지는 복합적인 구조물은 산산조각 나고 만다.

 죽을 때 일어나는 것을 지극히 간략하게 말한다면, 매우 미묘한 단계의 의식은 육신이 없어지더라도 여전히 지속되어 <바르도>라 불리는 일련의 상태를 겪게 된다. 바르도 가르침에 따르면, 죽음 이후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무리 무섭더라도 두려워할 까닭이 없다. 그것은 우리가 바르도 상태에서 더 이상 몸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몸>이 없거늘 도대체 어떤 해침을 입을 수 있으랴! 그러나 문제는 바르도 상태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물리적인 견고함에 어리석게도 집착함으로써, 자아에 대해 그릇된 집착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삶의 모든 고통의 근원이 되는 이러한 환상이 지속됨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할 때, 특히 <생성 바르도의 상태>에서 더욱 고통스럽게 된다.

 중요한 것은, 아직 우리가 육체를 지니고 있는 지금 이 삶에서, 그렇게 견고해 보이는 것이 단순한 환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명상 후에 <환상에 빠진 어린아이가 되기>를 배우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항상 되풀이하는 우리 자신과 세계에 관한 지각을 견고하게 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명상 속에서 하듯이, 모든 환상적이고 꿈 같은 현상들을 똑바로 보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환상에 지나지 않는 육체의 덧없음을 깊이 지각하는 것은, 우리가 집착을 내려놓도록 돕는 가장 심오하고 영감 넘치는 깨달음 중의 하나이다.

 이런 앎에 의해 고취되고 준비하고서, 죽음과 대면할 때, 우리는 아무 두려움없이 육신의 덧없음을 알아차릴 수 있고, 육신에 대한 온갖 집착으로부터 조용히 벗어날 수 있고, 육신이 아무리 고맙고 좋더라도 이제 헤어질 때인 줄 알아 기꺼이 뒤에 남겨놓을 수 있으리라. 사실, 우리가 죽음을 맞이할 때 우리는 참으로 완벽하게 죽을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궁극적인 자유를 성취하는 것이 가능하다.

 또 죽음의 순간이 아무도 살지 않는 마을의 낯선 경계선이라고 생각해 보자. 만일 우리가 육신의 덧없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육신을 잃을 경우 우리는 감정적으로 큰 상처를 입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무한한 자유의 가능성, 바로 저 육신의 부재에서 비롯하는 자유의 가능성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된다.

 그렇게 오랫동안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를 좌우하고 지배했던 육신으로부터 우리가 마침내 벗어날 때, 한 생의 카르마는 완전히 소진되지만 미래에 만들어질 수 있는 카르마도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상태이다. 따라서 죽음의 순간 생기는 것은 풍부한 가능성의 <틈> 또는 공간이다. 그것은 거대하고 풍요로운 힘을 함축한 순간이다. 문제가 되는, 또 문제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우리 마음의 상태이다. 물질적인 육체에서 벗어난 마음은 놀랍게도 항상 있어왔던 모습 그대로 나타난다. 즉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말이다.

 따라서 죽음의 순간에 우리가 마음의 본성을 확고하게 실현했다면, 우리는 한순간에 자신의 모든 카르마를 정화할 수 있다. 또 우리가 계속해서 확고하게 알아차릴 수 있다면 마음 본성의 근원적 순수함의 공간에 들어감으로써, 해탈에 도달함으로써 자신의 카르마을 종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파드마삼바바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바르도 상태에 머무는 동안 마음의 본성을 한순간에 알아차린다고 해서 우리가 어떻게 안정될 수 있을까. 그대는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대답은 이렇다. 현재 우리 마음은 그물, <카르마의 바람>이라는 그물에 갇혀 있다. 또 <카르마의 바람> 역시 그물, 우리의 물질적 육체라는 그물에 갇혀 있다. 그 결과 우리에게 자립이나 자유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이 마음과 물질로 나뉘자마자, 마음이 미래의 몸이란 그물에 다시 한번 갇히기 전까지, 그 틈새에서 불가사의한 능력을 지닌 마음은 아직 아무런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토대가 없다. 마음이 그와 같은 물질적 토대를 결여하는 한, 우리는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자립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곧바로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마음의 본성을 곧바로 알아차림에 의해 안정을 성취하게 되는 이런 힘은 영겁의 어둠을 한순간에 몰아낼 수 있는 횃불 같은 것이다. 따라서 스승이 가르침을 전수할 때에 우리가 수용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바르도 상태에서도 마음의 본성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우리가 깨달음을 성취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지금 바로 이 순간부터 수행을 통해 마음의 본성에 친숙해져야 한다.

 

 

                                                                                                            티베트의 지혜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