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무장들

호소카와 타다오키

그대로 그렇게 2016. 4. 8. 16:39

호소카와/나가오카 다다오키(細川/長岡忠興), 1563년 ~ 1645년)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를 거친, 무장, 다이묘이다. 단고 미야즈 성주를 거쳤으며 부젠 고쿠라 번의 초대 번주였다. 또, 부친 호소카와 유사이 만큼이나 교양인으로도 유명하며, 센노 리큐의 일곱 제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다도의 유파인 산사이류(三斎流)의 개조(開祖)이다.

친부(親父)는 호소카와 유사이(후지타카(藤孝)), 양부(養父)는 오슈 호소카와 가문(奥州細川家)의 호소카와 데루쓰네(細川輝経)이며, 정실은 아케치 미쓰히데의 딸 다마코(일반적으로 호소카와 가라샤로 알려져 있다). 통칭은 요이치로(与一郎)이다. 다다오키(忠興)의 '다다(忠)'는 오다 노부나가의 적자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의 이름 글자 중 하나인 '다다'(忠)를 물려받은 것이다. 쇼군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추방 당한 후에는 나가오카 씨(長岡氏)를 칭하였으며, 그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하시바 씨(羽柴氏)를 하사받아 하시바 씨를 칭하기도 하였지만, 오사카 전투 이후에는 호소카와 씨로 돌아왔다.

아시카가 요시아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당대의 실력자를 섬기며 현대까지 이어지는 히고 호소카와 가문(肥後細川家)의 기초를 다진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다.

당대의 실력자만 섬겼기에 가문이 안전하게 지내올 수 있었다.

여기서 재밌는 건 그의 부인 가라시아이다.



부부 사이[편집]

정실인 다마코(세례명은 가라샤)를 향한 애정이 굉장히 깊어 그녀의 아버지인 미쓰히데가 혼노지의 변을 일으켰을 때에도 이혼하지 않고 유폐시켜, 화가 미치는 것을 피했다. 두 사람은 당대 제일의 미남미녀 부부로 일컬어졌지만 히데요시의 기독교 금지령 발표 직후 다마코가 기독교도가 되자 격노한 다다오키는 다마코의 시녀의 코를 베며 협박하여 다마코에게 개종을 강요했다고 한다. 또,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정원사를 손수 베어 죽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편 조선 출병 중에도 다마코에게 여러 통의 편지를 썼다. 그 내용은 히데요시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아내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서 아내가 이시다 미쓰나리에 의해 사망하자 머리끝까지 분노하여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자 오직 이시다 미쓰나리를 살해하기 위해 동군에 가담했으며 특히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를 한 이후에 이시다 미쓰나리만은 무조건 죽여야만 한다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진언하여 결국 이시다 미쓰나리를 참수당하게 하는 데에 성공했다.




타다오키는 의처증이 있어 자신의 정실 가라시아를 끔찍히 아끼고 사랑했다고 한다.

그래서 미친 짓도 많이 했는데...



가라샤에 대한 타다오키의 집착을 보여주는 일화가 여럿 전해진다. 가라샤가 정원에 나와 대야에 손을 씻고 있는데 정원사와 잠시 눈이 마주쳤다. 이를 본 타다오키는 매우 분노하며 뛰어가서 당장 정원사를 베어 죽였다.자기는 애첩 있으면서 가라샤는 타다오키의 집착에 이미 진절머리가 난 상태여서 대야에 피가 튀어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타다오키가 급흥분하며 '넌 뱀같은 여자다'라고 하자, '악마의 마누라로는 뱀이 제격이겠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잘못을 저지른 가신을 가라샤가 감싸자, 타다오키가 더 화를 내며 아예 그 가신을 죽여버린 일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타다오키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닌 모양. 그리고 가라샤는 이렇게 죽은 이들의 머리를 모아 장식하였다고 한다. 결국 타다오키와 시아버지인 호소카와 후지타카까지 사과해서 이 머리들을 간신히 치웠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 파견되었던 선교사들이 인신매매를 하거나 선교사들의 꾀임에 넘어간 다이묘들이 땅밟기, 정확히는 절을 멋대로 부수고 중들을 내쫓거나 해서 물의를 빚게 되었다. 이로 인해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결국 기독교가 금지되고 선교사들은 추방된다. 타다오키도 신자들을 박대하기 시작했는데 가라샤는 신자 중에서도 특히 규범이 될 만큼 기독교에 빠져 있었다. 때문에 타다오키는 가라샤의 시녀들의 코를 자르거나 유곽에 팔아치우기도 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마누라 스토커...;;;


히데요시의 사후 이에야스는 오사카에 오라고 했는데도 오지 않고 버틴 120만석 영주 우에스기 카게카츠를 친다는 명목으로 아이즈로 출병한다.

이때 기회를 노리던 이시다 미츠나리는 드뎌 본색을 드러내 모리 테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고니시 유키나가, 시마즈 요시히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등을 규합해 이에야스를 치려한다.

그때 이에야스와 함께 우에스기 정벌에 나서있던 히데요시 시대의 도자마 다이묘(호소카와 히데아키, 가토 요시아키, 쿠로다 나가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키요카사, 이케다 테루마사 등..)들의 부인들이 거의 오사카 내에 자신들이 가문 저택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시다 미츠나리는 이 다이묘의 부인들을 인질로 삼아 그들의 남편들이 나중에 정상적인 활동을 못하게 하려고 도모한다.


미츠나리는 가장 먼저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부인에게 요도부인이 있는 오사카 성에 오라고 정중히 부탁했으나 번번히 거절당한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군사들을 이끌고 억지로 데리러 가려는데, 이때 타다오키의 부인 가라시아는 자살을 금기시하는 천주교의 교리에 따라 가신에게 자신을 찌를 것을 강요하고 숨진다.


이 소문이 오사카에 퍼지자 다이묘들의 부인들은 자신들의 영지로 도망가거나 미츠나리의 의욕저하로 인질 규합을 하지 못함에 따라 무사히 자신들의 저택에서 살게 되지만, 이들을 감시하기 위해 미츠나리는 자신의 병력을 나누어 배치하게 되는 상황이 생기게 되어 자신의 병력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가라시아의 죽음의 의미는 여러가지인 것 같다.

첫째, 자신이 오다 노부나가를 죽인 아케치 미츠히데의 딸이었단 핸디캡이 가장 컸을거라는 거다. 만약 도망가거나 구명하기 위해 인질로 잡히거나 하면 '역시 배신자 미츠히데의 딸..' 이란 오명을 덮어쓸게 분명하기 땜에 자살을 택했을거라는 점이다.

둘째, 타다오키의 지나친 애착에 진절머리가 났을 수도 있다. 미츠나리가 굳이 오사카성에 갈 필요없다, 가라시아의 친척뻘 되는 우키타 집에 가서 있어도 된다.. 라고 했지만, 만약 그렇게 했다면 또 의처증 환자인 타다오키가 의심하여 난리칠테고, 자신의 집 거실내에서만 자유를 누릴 수 있던 가라시아가 다른 곳에 간다는 건 타다오키의 의심과 미친 분노를 피할 수 없는 길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죽음을 택하는데 어느 정도 이런 요인도 있지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셋째, 자신의 형제들은 아버지인 미츠히데의 배신으로 인해 죽임을 당하거나 이혼당하는데 그래도 호소카와 가문은 자신을 받아주고, 아이들까지 낳게 도와주었으니 그 은혜에 대한 보답을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이로 인해 호소카와 가문은 지금까지도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니깐 말이다. (일본 총리중에 이 후손도 있다는..)



암튼 이로 인해 호소카와 타다오키는 분노가 극에 달해서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해 에도바쿠후를 여는데 귀중한 도움을 준다.




이를 종합해보면 가라시아의 자결이 이에야스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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