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사무라이 ‘사카모토 료마’ 열풍에 휩싸인 일본

그대로 그렇게 2010. 11. 9. 15:38

사무라이 ‘사카모토 료마’ 열풍에 휩싸인 일본

메이지 유신 이끈 영웅… 경제위기 극복 반면교사 재조명

이코노믹리뷰 | 입력 2010.11.09 11:44

 



일본 막부 말기인 1861년 한 시골 출신 하급 무사가 에도(오늘날의 도쿄)로 상경했다. 서양 열강의 침략에 울분을 토하며 검술을 연마한 그는 개화파의 거두를 암살하려 시도하지만 오히려 그 사상에 감화 받고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된다. 훗날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된 그의 이름은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1836~1867)였다.

사카모토 료마가 일본 국민들에게 잘 알려진 계기는 1962년 소설가 시바 료타로의 소설 '료마가 간다'를 통해서다. 그는 막부시대 말기 당대의 손꼽히는 검객이자 서양 근대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선구자였으며 무엇보다도 일본 근대화의 길을 연 국민적 영웅으로 불린다.

그는 당시 최대 지방 세력인 사쓰마 번(薩摩藩)과 조슈 번(長州藩)을 중재해 에도 막부 타도를 위한 동맹을 성사시켰고 이듬해 막부가 메이지(明治) 천황에게 통치권을 넘긴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이루었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봉건시대를 종식하고 메이지 유신을 통한 중앙집권적 근대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오늘날 일본인들은 료마가 없었다면 메이지 유신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시대의 풍운아로 불리는 그의 드라마틱한 삶도 대중들에게 깊이 각인된 이유 중 하나다. 요즘 일본에는 사카모토 료마 열풍이 불고 있다.

료마를 주제로 한 TV 드라마만 8개가 제작됐고 료마 '마니아'들까지 생겨날 정도다. 유력 정치인과 기업인들도 연설에서 료마를 단골로 언급한다. 자신의 롤 모델이 료마라고 말하는 손정의(마사요시 손) 소프트뱅크 회장이 대표적이다.

NHK가 올해 1월부터 드라마 '료마전'을 방송하기 시작한 이래 상반기 료마의 출생지인 시코쿠(四國) 남부 고치현(高知縣)의 관광객 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71% 늘어난 240만 명을 기록했다. 료마 '붐'으로 창출된 고치현의 경제 효과만 409억 엔에 이를 정도다.

일본 삿포로맥주는 9월부터 일본 전국에 '어이! 료마'란 이름의 한정판 맥주를 출시했다. 오가와 가쓰히토 삿포로맥주 홍보담당은 "지금까지 48만개가 팔렸으며 올해 가을까지 120만개가 팔릴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처럼 료마의 인기가 높은 데는 오늘날 일본이 처한 상황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소비자 물가가 급락하고 재정 적자가 불어나는 가운데 인구의 노령화까지 겹쳐 일본 경제의 전망은 어둡다. 엔고로 수출기업이 고전하고 있지만 환율 문제의 국제적 해결 논의에서도 일본이 손해를 보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 등 주변국과의 영유권 갈등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여론이 비등하면서 간 내각의 지지도까지 하락하고 있다. 고치현 료마기념박물관의 모리 켄시로 디렉터는 "료마는 일본이 하나로 통일되지 않으면 서양 열강에 맞설 수 없다고 보았다"면서 "오늘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일본의 상황은 료마의 시대와 비슷한 점이 많다"고 말했다. 쇄국과 개화의 갈림길에서 과감한 결단으로 역사를 개척한 료마의 모습이 오늘날 일본인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김영식 아시아경제 기자 grad@asiae.co.kr
< ⓒ아시아경제신문이 만든 고품격 경제 주간지 '이코노믹 리뷰' (www.ermedia.net) 무단전재 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