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어

御種人蔘

그대로 그렇게 2009. 9. 22. 14:40

인삼에 대한 인류 최초의 기록 문헌은 중국 전한(前漢)의 원제시대(元帝 BC:33-38)시대에 사유(史遊)가 저술한 급취장(急就章)으로서 인삼을 “蔘"으로 기록하였으며 후한(後漢, AD:196-220)에 장중경(張仲景)이 저술한 상한론(傷寒論)에는 인삼을 배합한 21개 약 처방이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인삼을 약의 조제에 이용한 최초의 기록이다. 또한 한방의서의 원본이라 할 수 있는 <신농본초경(神農本草徑)>에 이르러서는 인삼의 산지, 품질을 비롯하여 그 약효와 응용 등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이 있었고 야생 인삼의 자생지 등 인삼에 대한 유래도 밝히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 이미 인삼이 이용되었으며 중국에 예물로 보내었고 또한 많은 교역을 하였던 바 이에 관한 기록은 중국의 많은 사료와 문적을 통해 고증된다. 중국 양(梁) 시대의 도홍경(陶弘景)은 그가 저술한 명의별록(名醫別錄)중에 백제 무령왕(武寧王 12년, AD:513년)은 양(梁)의 무제(武帝)에게 인삼을 예물로 보내었음을 기록하였으며 당(唐) 시대의 문적인 책부원구(冊府元龜)에는 신라 진평왕이 당의 고조(古祖) 10년(AD:627)에 사신을 통해 인삼을 예물로 보내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삼의 효과가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고 약초로서의 가치가 나날이 높아지자 야생인삼(山蔘)의 채취만으로는 도저히 그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인삼의 부족현상이 고려말엽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조선조에는, 중국의 요구와 왕실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관의 주구가 혹심해져서 할당량을 조달하기 어렵게 된 인삼산지의 지방민들은 고향을 떠나버리는 사태마저 빈번하였다 한다.

이미 중국도 남획으로 자연삼이 거의 절멸할 지경에 이르렀으나 한반도에서 인삼을 수급하여 지탱되었으니 공급하는 우리나라는 인삼을 확보하여야 하는 필요성에 의하여 인삼 재배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 시기는 고려말경으로 추종된다. 그후 조선 영조대왕 시대에 와서 인삼재배는 크게 발전되고 전국적으로 일반화되었다.

중국의 인삼 재배는 청(淸)대에 와서 수요가 급증함에 반하여 산출 수량이 감소되어 산에 종자를 인공적으로 파종하여 번식을 시켰을 것으로 추측되며 청대 후기에 와서 본격화되었다. 청의 건융(乾隆)년대 중기 이후 말년까지는 산양삼(山養參)이 주종을 이루었고 가경(嘉慶), 도광(道光)년대에는 점차 규모가 커져서 농업화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인삼의 자생이 전혀 없던 나라이며 742년에 조선으로부터 인삼 30근을 받았다는 기록이 인삼 도입의 최초라고 되어 있다. 인삼의 중요성을 인식한 일본이 드디어 강호 막부(江戶幕府)시대에 이르러 조선에서 인삼의 생근(生根)과 종자(種子)를 얻어 1727년경 닛꼬(日光)로 가져와 재배에 성공한 것이 재배의 시초라 한다. 지금도 일본의 인삼을 가리켜 ‘어종(御種) 인삼'이라고 부르는 것도 조선의 인삼 종자로부터 그 근(根)이 시작되었다는 데 연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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