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정조 주변 여자들

그대로 그렇게 2008. 7. 16. 14:52
정순왕후
1745(영조 21)~1805(순조 5).
조선 제21대 왕 영조의 계비(繼妃).
경주김씨(慶州金氏)로, 아버지는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한구(漢耉)이다.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徐氏)가 죽은 뒤, 1759년(영조 35)에 왕비에 책봉되었다. 1772년 예순(睿順)·명선(明宣) 등의 존호를 받았다. 소생은 없었고, 정빈 이씨(李氏)의 소생인 사도세자와 사이가 나빴다. 나경언(羅景彦)이 아버지 한구의 사주를 받아 세자의 비행을 상소하자, 사도세자를 서인으로 폐위시키고 뒤주 속에 가두어 굶어죽게 했다(→ 사도세자사건). 그후로도 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시파(時派)를 미워하고, 그 반대파인 벽파(僻派)를 옹호했다. 정조가 죽고 나이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하면서 공서파(攻西派)와 결탁하여 천주교 금압령을 내려 신서파(信西派)를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능은 원릉(元陵)이며 시호는 정순이다.
 
효의왕후
1753(영조 29)~1821(순조 21).
조선 제22대 왕 정조의 비(妃).
본관은 청풍(淸風). 아버지는 좌참찬 김시묵(金時默)이며, 어머니는 홍상언(洪商彦)의 딸이다.
1762년(영조 38) 세손빈(世孫嬪)으로 책봉되어 어의동 본궁(本宮)에서 가례를 올렸고, 장조(莊祖 : 사도세자)의 비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를 잘 섬겨 영조에게 총애를 받았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한 뒤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자식을 얻지 못했다. 궁중 내의 우애를 중시하여 실천했으며, 사정(私情)에 흐르지 않아 수진궁(壽進宮)·어의궁(於義宮)에서 쓰고 남은 재물이 있어도 공물(公物)로 분류, 손대지 않았다. 검소한 생활로 명망이 높았고, 1820년(순조 20) 대신들이 하수연(賀壽宴)을 베풀고자 했으나 사양했다. 휘호는 예경자수(睿敬慈粹), 시호는 효의이다. 능은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에 있는 건릉(健陵)이다.
경의왕후
1735(영조 11)~1815(순조 15).
조선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思悼世子:莊祖)의 비(妃).
한중록 /〈한중록〉, 혜경궁 홍씨 지음, ...
본관은 풍산.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로 알려져 있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이며, 정조의 어머니이다. 1744년(영조 20)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의 당쟁에 휘말려 1762년 남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비운을 겪었다. 사도세자가 죽은 뒤 둘째 아들이 왕세손에 책봉되어 혜빈(惠嬪)의 호를 받았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궁호(宮號)가 혜경으로 올랐다. 환갑을 맞은 해(1795년)에 〈한중록〉을 썼는데, 이 작품은 남편의 참사를 중심으로 자신의 한 많은 일생을 회고하며, 자서전적인 사소설체(私小說體)로 기록한 것이다. 문장이 섬세하고 아담하여 〈인현왕후전〉과 아울러 궁중문학의 쌍벽으로 평가되고 있다. 1899년(광무 3) 남편이 장조(莊祖)로 추존됨에 따라 경의왕후에 추존되었다.
 

수빈 박씨

수빈 박씨(1770년~1822년)는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이다.

생애

본관은 반남이다. 좌찬성 박준원의 딸로 정조 11년 2월 18일에 후궁으로 들어오고 그 후에 수빈이라는 빈호를 받게 되었다. 평소 성품이 온화하고 예절이 바르었으며 사치를 멀리한 생활을 하여 어진 후궁이라 하여 현빈(賢嬪)이라 일컬었다. 그 후 1790년에 정조의 2남 되는 순조를 낳았고 다음에 숙선옹주를 낳았다. 왕자를 낳은 후에도 당시의 왕비인 효의왕후를 위로하며 공경하였고, 왕자가 세자로 책봉되자 아첨하는 무리들이 재물을 보내어 의금부에 잡혀 가기도 하였다. 그 후 가순궁이라는 궁호를 하사 받았다.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보위에 오르고 나서도 당시 대왕대비 김씨혜경궁 홍씨, 그리고 왕대비 김씨를 늙어서 봉양하여 칭송이 끊이지 않았다. 1822년에 죽어 궁정동 경우궁에제향되었다.

의빈 성씨

의빈 성씨(宜嬪 成氏, 1753년~ 1786년)는 조선 정조후궁으로, 정조의 장남인 문효세자를 낳았다. 정조는 궁인들을 매우 불신해 멀리 했으나 무슨 까닭에서인지 600여명의 궁녀들 중 유일하게 의빈 성씨만이 사랑을 받았다.[독자연구?]

 생애

1753년 7월 22일 태어났다. 아버지는 양반으로 생전 종2품 벼슬까지 오른 증찬성 윤우이고,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임씨이다. 천민 첩의 딸일 가능성이 높다.

정조의 후궁 화빈 윤씨의 처소 지밀 나인이었으나 정조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고 내명부 정5품 상의(尙儀)로 승격됐다가 1782년(정조 6년) 9월 7일, 성씨가 왕자를 낳자 그 뒤, 왕자를 원자로 책봉하고 왕세자로 책봉했다. 1784년(정조 8년) 윤 3월 20일에는 의빈 성씨가 을 낳지만 그렇게 얻은 옹주는 첫 돌을 넘기기도 전에 사망하고, 문효세자는 1786년 5월 11일에 훙서한다. 1786년(정조 10년) 9월 14일 의빈 성씨는 세 번째 출산을 앞둔 만삭의 몸으로 요절한다. 학계에서는 의빈 성씨의 죽음이 효의왕후에 의한 독살이라는 의혹이 있다.

묘는 옛 효창원(현 효창공원) 자리에 있었으나 1944년에 왕실의 권위를 훼손하려는 일본의 의도로 서삼릉으로 강제 이장돼 원형에서 훼손되어 어제비 등만이 남아있다. 현재 원빈 홍씨의 무덤과 나란히 있다. 정조는 특별히 안국동에 의빈 성씨의 사당을 만들어 의빈궁이라 불렀고 이는 고종 때 칠궁에 속했으나 순종 때에 매장되었다.

 
 

원빈 홍씨

원빈 홍씨(元嬪洪氏, 1766년~1779년)는 조선 정조의 첫 번째 후궁이다. 정조 시기 초의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홍국영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생애

본관 풍산, 홍낙춘의 딸로 정조대 권신인 홍국영의 누이다. 효의왕후 김씨가 아이를 낳지 못해, 정조 2년인 1778년 6월 후궁으로 간택되어 입궁하였고, 궁호는 숙창이다.

이듬해인 정조 3년 5월 갑작스럽게 사망하여, 시호는 인숙, 궁호는'효휘',묘는 '인명원'이다.

홍국영은 동생의 죽음에 효의왕후의 독살이라 믿었고 왕의 동생 은언군의 아들 이담을 효의왕후의 양자도 아닌 원빈의 양자로 삼아 정조의 후사를 이으려 하여, 정조의 후사문제에서 효의왕후와 반목하게 된다. 하지만, 홍국영에 대한 탄핵의 강도가 높아지면서 정조는 홍국영에게 사직을 권고하여 관직을 떠나게 되나, 이후 효의왕후의 음식에 독약을 넣어 시해하려 했다는 탄핵(왕비 김씨와 갈등을 빚기는 하였으나 독살하려 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음)으로 인해 강릉으로 유배, 몇달 뒤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정조 10년 자식없는 후궁의 묘에 세자의 묘인 '원'의 호칭을 준것과, 중종비 문정왕후의 휘호인 '인명'이라는 글자를 사용한 것은 가당치 못하다는 상소로, 인명원의 원호가 취소되고, '원빈홍씨지묘'로 이름이 바뀌었다.

원빈홍씨의 묘는 현재 고양시 원당의 서삼릉 권역내, 후궁묘역내로 이장되어, 정조의 다른 후궁인 의빈성씨와 나란히 묻혀있다.

 

화빈윤씨

실제 역사상에 화빈윤씨에 대한 세세한 기록이 없다고 합니다.

화빈윤씨는 정조의 두번째 후궁입니다.

남원윤씨 좌찬성 윤창윤의 딸로 정조 5년 1월 딸을 낳았으나 옹주는 일찍 죽고

이후 아이를 낳았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단 정조보다는 훨씬 오래살아 순조 24년 1월 24일 병으로 사망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화빈 윤씨는 홍국영의 누이 원빈 윤씨가 죽자 두번째 후궁으로 간택된 인물입니다.

의빈 성씨(성송연)는 윤씨의 시중을 들던 나인으로 정조의 눈에 들어 첫 아들을 성씨에게서 얻게 됩니다.

 


 

효의왕후가 불쌍한 점 : 왕의 사랑을 받지도 못했고, 자식 한번 못 낳아봤다.

 

효의왕후가 안불쌍한 점 : 죽어서 왕 곁에 묻혔고, 자기랑 처지가 비슷한 정순왕후, 혜경궁 홍씨가 옆에 있어 위안 삼아 살았다.

 
효의!! 진짜 원빈홍씨랑 의빈성씨를 독살한거야?
 
원래는 효의왕후가 불쌍해서 검색해본건데, 이거 보니깐 의빈 성씨가 더 불쌍하다는...  ㅠ.ㅠ (왕의 사랑 받은 걸로 위안삼길...역대 왕중에 젤로 잘생기고 똑똑한 왕이었으니까...)
 
아마 의빈성씨는 임신중독증으로.. 원빈홍씨는 넘 어린데다 시집가서 적응 못해 죽었을 것 같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