にっき

전생을 아는 한 초록뱀 이야기.(소설...ㅋㅋ)-- 부제 : 뱀 풀 뜯어먹는 소설.

그대로 그렇게 2015. 6. 1. 15:15

나와 그녀는 전생에 친구였다.

그녀는 전생에 물론 남자였고, 나도 남자였다.

우린 정말 친한 친구였고 같이 수행도 했지만, 나는 부인이 아닌 다른 여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죄로 이 생에 뱀으로 태어났다.

태어날 땐 흰색이었다.

모두 흰색이 아니라 검은 줄무늬가 있는 줄무늬 흰 뱀이었다.

 

2001년 어느 초여름 그녀가 남편과 함께 내가 있는 경상북도 청량산에 온다는 걸 알았다.

난 약간의 초능력도 있어서 사람들의 속살 뿐 아니라 속마음도 알 수 있다.

그녀는 전생에 내 소중한 친구였고, 언제나 그녀를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내 주변에 온다는 사실을 아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물론 산 정상에 오를 것이고, 난 그 밑에서 얌전히 그녀를 기다렸다 살짝 인사해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왔다.

뚝심이 있는 그녀는 역시 남편과 함께 정상까지 올라왔다.

그녀에게 인사를 할까 말까 망설여졌다.

어떡하지... 방황하고 있던 와중에 그녀가 내가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철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난 아주 얌전히 엎드려 있었다.

아무짓도 안했다.

날 뚫어지게 쳐다보는 그녀...

다른 사람들은 날 몰라보고 그냥 지나쳤는데, 역쉬 그녀... 뭔가 느낌이 있는지...

그때 갑자기 꽥!! 하는 돼지 멱따는 소리가 들리더니 철계단을 우당탕 쿵탕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였다.

날 본 그녀는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고 있었다.

뒤따라가던 그녀의 남편은 "왜 그래? 왜 그래?" 하면서 그녀를 쫓아가고 있었다.

아... 그녀는 뱀을 싫어하는 것이었다.

 

난 너무 슬퍼 몇일동안 잘 먹지 않았다.

그리고 뱀을 보고 놀란 그녀가 이제 다시는 이 산으로 오지 않을거란 직감이 들었다.

그래서 난 이 산을 뜨기로 했다.

북쪽으로 올라갔다.

그녀처럼 채식을 하고자 쥐나 벌레들을 잡아 먹지 않고 풀만 뜯어 먹으며 살았다.

그랬더니 내 몸이 점점 초록색으로 변해갔다.

키가 커지고(몸이 길어지고) 검은 줄무늬의 간격이 많이 넓어졌다.

채식만 해서 그런지 몸에 더 이상 살이 찌거나 하진 않았다.

곡식을 먹으면 살이 찔텐데 사람들한테 잡힐까봐 두렵기도 하고 농약을 하도 많이 쳐서 곡식을 심어 놓는 논밭엔 아예 가질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다른 초록뱀처럼 거무튀튀한 초록색이 아니라 밝은 초록색, 거의 연두색에 가까웠다.

 

그렇게 십몇년이 흘러 2015년 5월 30일... 그녀가 내가 있는 강원도 정선으로 가족과 함께 캠핑을 왔다.

이제 중년의 나이가 된 그녀.

더이상 뱀을 무서워하지 않을만큼 중후한 나이가 되었으니 날 반가워해줄 수 있지 않을까...

밤에 나타나면 내 모습이 보이지도 않을테니, 그 담날을 기다리기로 했다.

드디어 다음 날...

난 그녀 앞에만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한참을 기다렸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그녀 혼자 쓰레기 봉투를 들고 계곡 위를 가로지르는 나무 다리를 건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풀숲에 숨어 있던 나는 저쪽에서 걸어오는 그녀를 보고 살며시 다리 위로 나왔다.

머리를 들고 있으면 자신을 위협하는 줄 알고 그녀가 많이 놀랄테니...

최대한 착한 모습으로 있을 예정이었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모습이 제일 착해보일 것 같았다.

날 보고 예쁘다며 웃는 그녀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한번도 건너보지 못했던 이 다리위의 나무...

햇볕을 받아서 그런가 너무 뜨거웠다.

얌전히 엎드려 있으려던 내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난 뜨거워서 어쩔줄을 몰랐다.

그래서 자세를 어떻게 잡지? 몸을 꾸불 꾸불 움직이고 있는데...

헉... 드디어 그녀가 가까이 왔다.

바닥을 보며 걷고 있던 그녀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처음엔 가만히 쳐다봤다.

뜨거워서 당황했지만, 조용히 있는 그녀를 보고 내심 안심했다.

'나이가 들어 그런지 너도 날 받아주는구나.'

그러나... 내 바램은 산산조각이 나고...

그녀는 또 청량산에서와 마찬가지로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지르며 자기 남편에게로 뛰어갔다.

 

아... 또...

난 너무 슬퍼서 다시 풀밭으로 몸을 숨겼다.

그녀의 가족들이 날 보러 다시 왔지만...

풀숲에서 엉엉울고 있는 날 절대 찾을 순 없었다.

 

그녀의 소식을 듣자니...

이제 초록색만 보면 내 생각이 나서 밥맛이 떨어진다는...;;;

아침에 함초나물을 보면서 내 생각을 하고 한 젓가락 밖에 안 먹었다는 소식...

점심 때 오이먹다가 내 생각을 하면서 밥을 못 넘겼다고 하고...

그나마 다행인건 그녀와 내 눈이 마주쳤다는거...

그녀가 내 까만 눈이 예쁘다고 잠시 생각했다는거...

 

아... 정말 너무 슬프다.

그녀는 언제쯤 철이 들까...

2-30년 후에... 나이 들어 머리가 하얗게 세었을 땐 날 이해해줄 수 있을까?

아니면 우리의 만남은 다시 다음 생으로 넘어가게 될까?

지금도 난 풀숲에서 그녀를 생각하며 슬퍼하고 있다.

그래도 그녀에게 한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날 미워하는 건 괜찮은데, 초록색을 싫어하진 말아줘~~"